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정샹 (문단 편집) === 외교총장과 [[중화제국(1915~1916)|중화제국]] 국무경 === 이후 루정샹은 [[자오빙쥔]] 내각에서 정치에 복귀, 1913년 [[선후대차관 사건]]의 체결에 참여했으며 1915년 1월, 외교총장 [[쑨바오치]]가 [[21개조 요구]]에 저항하여 사직하자 [[쉬스창]] 내각에서 다시 외교총장에 임명되어 1915년 [[21개조 요구]]에 대해 외교차장 조여림과 함께 [[일본 제국]] 공사 히오키마스과 협상하였는데 교섭 경과를 언론과 열강에 폭로하며 일본의 무리한 요구에 저항했다. 21개조 요구 중에 가장 무리수였던 5조라도 반박된 것에는 루정샹의 공이 있었다. 한편 황제가 되고 싶었던 위안스카이는 루정샹에게 압력을 넣어 열강이 제제에 찬성하고 있다면서 제제 추진 운동에 참여하게 했다. 정작 각국 공사들은 루정샹에게 제제에 대해 반대하는 뜻을 전해왔다. 이후 1916년 5월, 일본과 러시아를 상대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국무총리 [[쉬스창]]이 [[홍헌제제]]에 반대하여 사퇴한 이후 국무경에 임명되어 1916년 3월까지 재임하다가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가 사태 수습을 위해 쉬스창을 다시 국무경에 임명하면서 교체되었다. 1917년 11월, [[왕스전]] 내각에서 다시 한번 외교총장에 임명되었고 1919년 [[파리 강화 회의]]에 출두하여 [[구웨이쥔]], [[왕정팅]], [[스자오지]] 등과 함께 참여하여 중국의 인구 규모, 오랜 역사, 근공검학 프로그램을 통한 공헌을 들어 중국의 대우를 2등국으로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3등급 대우를 받아 구웨이쥔과 함께 할당된 2명의 대표로 참석했다. 강화회의에서 루정샹과 구웨이쥔은 7개조 의견서를 제출하여 21개조 요구가 무효임을 주장하고 불평등조약 개정을 요구했으나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에게 묵살당했다. 결국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대표단은 이를 정부에 보고했다. 이때 조약 서명 거부를 촉구하는 [[5.4운동]]이 일어났고 [[파리(프랑스)|파리]]에 있을 때 조약에 서명하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교포들과 유학생들에게 숙소가 포위당하는 봉변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1920년 8월 외교총장에서 사퇴했다. 이후 1922년부터 1927년 [[국제연맹]]의 중국 대표로 재직하다가 스위스 공사로 이임했으며 1927년 아내가 사망한 이후 실의에 빠져 모든 공직 생활에 은퇴하고 [[가톨릭]]에 귀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