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룽윈 (문단 편집) === 몰락 === 결국 장제스는 룽윈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945년 4월, 장제스는 쿤밍방위사령부 사령관 [[두위밍]]을 소환하여 룽윈을 군사참의원 원장에 임명함으로 운남에서 제거하는 방안을 논의하였고 7월, 윈난 출신의 측근인 이종황에게 윈난성 정부주석 취임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8월에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하면서 윈난성에 대한 조치는 잠시 미뤄졌다.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갔지만 룽윈은 중앙이 자신을 해임하고자 한다면 명령서 하나로 충분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4개 사단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파견하였다.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윈난군은 약탈과 학정으로 베트남 사람들의 원성을 샀으며 북베트남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군사정부의 수립까지 도모하여 연합국과 장제스의 불만을 동시에 사게 되었다. 결국 1945년 10월 2일, 장제스는 룽윈을 모든 공직, 당직에서 해임한 후 군사참의원 원장에 임명하겠다는 명령서를 두위밍에게 전달했고 두위밍은 10월 3일 새벽, 중앙군 5군을 동원해 룽윈의 자택을 포위했다. 룽윈은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뒷문을 통해 윈난군 사령부로 달아났으며 윈난군과 정부군의 소규모 교전이 발생했다. 룽윈은 두위밍이 장제스의 명령을 전달하자 교전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는데 실제로 교전은 더 이어졌다. 어쨌거나 룽윈이 자신이 장제스의 충실한 부하로 선전하고 다녔고 두위밍이 다짜고짜 선빵을 때린 건 사실이라서 두위밍은 책임을 묻고 10월 16일 쿤밍방위사령부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룽윈은 측근인 노한에게 성정부 주석 자리를 물려주겠으니 그가 인도차이나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했으나 장제스는 10월 5일까지 충칭으로 올 것을 명령했다. 룽윈이 몰래 동원하려 한 민병대는 중앙군에게 모두 제압당했고 룽윈은 항복하고 충칭을 거쳐 난징으로 갔다. 이후 장제스는 프랑스와 협상하여 프랑스령 광저우만을 반환받는 조건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윈난군을 철수시켰다. 이후 룽윈은 3년 동안 군사참의원장이라는 허울좋은 직함만 달고 감금되어 살았으며 [[다이리]]의 감시를 받았다. 장제스는 룽윈의 접견을 거부했고 룽윈은 공포에 떨었다. 결국 룽윈은 1948년 12월, 난징을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친분이 있던 [[클레어 셰놀트]] 장군에게 특사를 보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 하니 제발 난징에서 빠져나가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룽윈과 각별한 친분이 있었던 셰놀트는 룽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고 C-46 수송기를 불러 룽윈의 탈출을 준비했다. 룽윈도 자신의 부관에게 전용차를 타고 가게 하여 특무의 주의를 끌게 한 다음 변장을 하고 개인비서 유종악, 부관 주지고를 대동하고 셰놀트가 준비한 비행기를 타고 상하이를 경유하여 광저우로 도주했다. 광저우에 도착한 룽윈은 곧이어 [[영국령 홍콩]]으로 망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