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뤄양시 (문단 편집) === 화려한 전성시대 === [[파일:백마사 중국.jpg|width=820]] [[후한]] 명제 11년 (서기 68년)에 세워진 백마사. 중국 최초의 사찰로, 뤄양에서 과거의 모습이 온전히 남은 몇 안되는 유적 중 하나다. [[파일:뤄양 중국 8.png|width=820]] [[룽먼석굴]]의 봉선사동. [[당나라]] 대에 조성되었다. 일단 워낙 입지 조건이 좋아서, 무려 13개 왕조가 1,586년 간 이곳에 도읍을 정했다. 주요 왕조로는 9개이기에 "9조고도(九朝古都 -9개 왕조의 도읍)"라고도 한다. 대충만 따져봐도 일단 (전설 속의)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동주), [[후한]], [[위(삼국시대)|위]], [[서진]], [[북위]], [[수나라]][* [[양제(수)|수양제]] 때, 동도라고 불렀다. 하지만 하나라의 경우 존재 여부가 아직 확실치 않고 유력한 유적 역시 뤄양이 아닌 [[이리두]] 유적이다. 상나라의 수도 역시 뤄양이 아닌 안양이다. 따라서 주나라부터 셀 경우 도읍으로 삼은 기간에선 시안에게 밀리고 9조고도는 전통적 인식으로서의 상징성이 있을 뿐이다.], 5대10국의 [[후량]] 등이 된다. 여기에 [[측천무후]]의 [[무주]](주나라)와 [[오대십국시대]]의 후당도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제2수도 격이 된 것도 서주, [[전한]],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 [[후진]], [[수나라]]([[문제(수)|수문제]]), [[당나라]], [[송나라]] 등 무려 여덟 왕조가 있었다.[* 여담으로 [[타이위안]]도 억지로 끌어모으면 9조고도이다. 태원은 춘추시대 [[조나라]], 남북조시대의 [[전진]], [[북제]], 당과 무주, 후당의 제3수도, 5대10국시대의 후진, 후한, 북한을 영혼까지 끌어모으면 9주고도가 된다.] 뤄양의 '뤄'은 낙수에서 따온 말인데, [[주공단]]이 낙읍을 경영하던 시기부터 낙수 락(洛)과 부엉이 락(雒)은 혼용되고 있었다. 지금 洛으로 고정되는 변천 과정은 [[오행]]설에 따른 것이다. [[진나라]]는 오행 중 수덕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천하를 통일한 후에 낙수 락 洛陽을 정식 명칭으로 둔 반면, 화덕을 숭상한 [[한나라]]는 물수변이 들어간 洛을 떼고 뤄양(雒陽)으로 개명해서 사용했다.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삼국시대)|위나라]]는 토덕을 받들었기에 물이 흙을 살려준다는 오행상생설에 따라 도로 洛으로 되돌리고 이를 고정시켰다. 동주 멸망 후 [[고제(전한)|한고제 유방]]도 처음에 이곳에 도읍을 정하려다 [[시안(도시)|장안]]으로 정했다. [[고제(전한)|한고제]]가 낙양을 수도로 정하려다 장안을 수도로 정한 경위는 [[유경]] 문서 참조. 그러다 [[후한]] 시절 [[광무제]]가 이곳에 도읍해 2백 년을 지낸다. [[파일:중국 낙양.jpg|width=820]] 하 ~ 수·당 시대 도시 유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현대 도심인 수당시대 도성, 백마사 관광지인 후한-북위 시대 도성 [[파일:낙양성_1.jpg|width=820]] 후한대 낙양성의 성벽 유구 당시의 낙양성은 현 뤄양 시가지의 동쪽에 있었다. 크게 동주, 후한-위, 수-당의 낙양성이 각각 구분된다. 지금의 낙양은 마지막 수당시대의 낙양성. 후한 당시의 낙양성도 지금의 뤄양의 일부지만 지금의 중심지보다는 약간 동북쪽에 있었으며(위의 지도상으로는 뤄양 시와 옌스 시 사이), 지금의 뤄양 자리에는 하남현이 있었다고. 비슷한 예로 [[왕십리]]와 [[신촌]](무악)이 지금이야 서울이지만, 과거엔 도시의 구획이 더 작았다. 후한 말기 [[동탁]]이 [[반동탁연합군]]을 피해 뤄양을 불태우고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뤄양은 초토화가 된다. 거기다 [[조조]]가 도성을 [[쉬창|허도]]로 옮겼지만, 허도는 [[임시수도]]였을 뿐 곧 뤄양 복구를 시작했다. 이후 조조는 자신의 말년을 뤄양에서 보내다가 사망하였고 조비가 즉위해 위나라가 세워지자 다시 뤄양을 도읍으로 잡았으며, 허도는 허창이란 이름으로만 우대받았을 뿐 수도의 기능은 상실되고 모두 뤄양으로 이주되었다. [[조비]]와 [[조예]]가 낙양에 화려한 전각들을 세우면서 뤄양은 곧 수도의 위엄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아직까지도 이곳 주민들은 동씨를 매우 싫어하는 반면에, 조씨는 대우해 준다. [[파일:중국 관우 3.jpg|width=820]] [[관우]]의 수급이 묻힌 [[관림]] (關林). [[관묘]]의 원조격으로, 매년 수많은 삼국지 매니아 및 관우 숭배자들이 찾는다. 뤄양은 위나라 멸망 후 통일 왕조 [[서진]]의 수도가 되었으나, [[사마치|회제]] 때 [[영가의 난|침략을 받아]] 불태워졌다. 당시 낙양은 [[전조]]의 [[유총]]과 그 부하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2만명이 학살되었고 황궁은 전소하였으며 황릉은 도굴되었다. 이로써 조위 ~ 서진 시기 한세기간 재건되었던 뤄양은 또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이어진 [[5호 16국]] 시기 뤄양은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328년 [[석륵]]이 낙양 전투에서 [[유요]]를 격파하여 그를 사로잡은 후, 더 나아가 전조를 멸하고 [[후조]]를 세운다. 3세기 후반 뤄양은 [[염위]] (冉魏), [[전연]], [[전진]]을 거쳐 [[후진]]의 영토가 되었다. 416년 겨울 [[유송]]의 북벌 당시 부관 [[단도제]]의 활약으로 한세기 만에 한족 왕조가 수복했으나 422년 [[북위]]의 명원제 [[탁발사]]가 점령했다. 430년 유송의 우장군 도언지가 뤄양을 재차 수복했으나 439년 [[태무제]] 탁발도가 다시 점령했다. 이로써 [[화북]] 지방은 북위에 의해 통일되었고, 493년 한화 정책의 일환으로 [[효문제]]는 수도를 산서의 평성에서 하남의 낙양으로 천도했다. 북위 수도가 된 뤄양에는 성내에 1367개의 사찰이 세워지는 등 문화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그중에서도 [[영녕사]]의 목탑은 비록 18년에 불과하긴 했지만 [[기자의 대피라미드]]와 함께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명성을 날렸다. 북위 시기 재건되었던 뤄양은 532-34 영희 연간의 내란으로 다시 파괴되었다. 북위의 분열 후 뤄양은 본래 [[서위]]에 속하였으나 543년 망산전투 (邙山之戰)로 [[동위]]가 점령하여 [[북제]] 정권으로 이어졌으나, 577년 [[북주]]에게 점령되었고 얼마후 북주는 [[수나라]]로 개편되었다. [[파일:정정문 중국.jpg|width=820]] [[수나라]] 대에 건국문 (建國門)으로 세워져 [[당나라]] 대에 정정문 (定鼎門)으로 개칭된 딩딩먼. [[파일:낙양 중국 5.jpg|width=820]] 수·당시대 황궁 재현 단지 [[수문제]]가 중국을 통일한 뒤부터 뤄양은 '동도(東都)'로 불리며 수도 [[시안(도시)|장안]]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된다. 이 시기에 뤄양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수양제]]가 뤄양을 동쪽의 수도로 만들면서 현 위치에 화끈하게 토목 공사를 벌여 지은 것. 이때가 뤄양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수·당 시기 황제들은 '''장안과 뤄양을 오가면서''' 통치를 했다. 당시 세워진 시가지가 현재의 도심으로 이어진다. 특히 중당 시기 중국의 유일한 여자 황제에 오른 [[측천무후]]는 일시적으로 당을 폐하고 [[무주]]를 건국하며 뤄양을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뤄양은 한세기 반만에 제1수도가 되었지만, 705년 [[신룡정변]]으로 당이 복원되며 다시 장안에 수도 지위를 내어주었다. 현재는 뤄양-[[시안시|시안]](장안)에 고속철도가 깔려 있어서 4시간 남짓한 거리로 갈 수 있다. 약 500km 정도의 거리이다. 고속철도를 타고 가다보면 온통 평야지대임을 알 수 있는데, 고대에 뤄양과 시안을 잇는 이 지역은 엄청난 생산력을 바탕으로 중국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후 기후 변화, 과도 경작으로 인한 황폐화, 지속적인 전란의 피해, 지력의 상실, 본격적인 강남의 개발 등으로 인해 송대 이후 중심 지역에서 밀려나 변두리로 전락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