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류석춘 (문단 편집) ===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다.' 기고문 논란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11138053|관련기사]] [[월간조선]] 10월호에 ''''전태일은 착취당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의 기고문을 게재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박정희 정권이 농촌 유휴인력을 [[자가용|마이카]] 가진 중산층으로 키웠다는[*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자가용이 널리 보급되었던 시기는 [[오일쇼크]]를 극복하고 경제개발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1980년대#s-3.2]]서부터였다. 전태일은 그보다 한참 전인 1970년에 사망했다.] 제목을 내세웠으며, 전태일의 월급이 6년간 15배나 올랐다면서 노동자 착취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전태일재단은 류 교수가 임금만 얘기하고 실질적 구매력은 무시했으며, 하루 15시간 일하던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처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올랐다는 전태일의 월급은 현재 가치로도 4만원에 불과하며 또한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자 평균 노동시간은 최소 주당 105시간이나 되었다는 것. 휴일도 없이 일주일 내내 일 15시간 이상 노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다 일당은 커피 한 잔 값인 50원, 재단사는 커피 10잔에 불과한 5백 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https://www.youtube.com/watch?v=2fu4vAtdM2U|#]] 또한 류석춘 교수가 간과한 점이 하나 있는데, 전태일은 자신의 월급이 적다고 노동운동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전태일이 노동운동에 뛰어든 계기는 당시 평화시장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직접 목격한 것이며, 어느 정도 중간직종으로 볼 수 있는 재단사였던 전태일과는 달리 여공들은 그보다 낮은 시다(재단보조)로 일하면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재단사가 된 것도 자신이 재단사가 되면 현장을 어느 정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봉합사에서 재단사로 옮겼던 것이며 재단사가 된 후에는 뜻이 있는 재단사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던 것을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두고 류 교수는 전태일의 월급만 가지고 당시 노동환경이 나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그마저도 틀린 것이다.[* 보통 재단사정도의 중간직으로 가면 시다들의 임금을 떼먹거나 착취하는 식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신분상승을 꿈꿀 수 있었다.] 2022년 11월 23일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받는다.[* 류석춘은 최후진술에서 역사적 진실은 여론재판이란 다수 의견으로 결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심지어는 책도 냈다.[[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000622163|전태일 바로보기 전태일 평전이 말하지 않는 이야기]] 전태일이 위인으로 대접받는게 사회주의 진영의 음모라고 주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