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류원후이 (문단 편집) === 사천의 패자 === 1927년 6월, 류원후이는 서강성을 지배하던 유성훈을 공격했다. 7월 12일 유성훈은 하야를 통전했고 류원후이는 서강성의 지배권을 획득했다. 1928년 사천성의 장령들을 류원후이를 사천성 정부 주석으로 추대했으며 난징정부로퉈 서강의 민재정을 통괄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에 류원후이는 학교를 설립하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 서강의 발전을 도모했으며 소수민족과의 화해를 강조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서강성의 실질적인 지배자는 류원후이보다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13세]]였다. 1929년 국민정부는 류원후이를 사천성 정부주석에, 류샹을 군사위원장으로 임명했다. 1929년 [[1차 장풍전쟁]]과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켜 [[반장전쟁]]에 가담했던 [[펑위샹]]이 류원후이에게 공개적으로 반장에 가담할 것을 촉구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1930년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이 [[장제스]]에 대항해 [[중원대전]]을 일으키자 류원후이는 베이핑에서 열린 확대회의에 호응하는 통전을 보내 [[왕징웨이]] 등 개조파 지지를 선언했지만 반장세력이 패배하자 즉각 장제스와 난징 국민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며 줄을 갈아탔고 [[일본 제국]]의 침략과 [[중국 공산당]]의 폭동에 대응하느라 정신이 없던 중앙정부는 류원후이를 용서하여 1931년 1월 성정부 개조 시에 다시 사천성 정부주석으로 재임명하고 민정청장을 겸하게 했다. 1932년 시점에서 류원후이는 청두를 중심으로 사천성의 147개 현 중 68개 현을 지배하여 사천성 제1의 세력이 되었고 그 휘하 병력은 12만으로 늘었다. 류원후이는 주요 곡창지대와 상업지대를 대부분 점령하여 가장 풍족한 재정을 자랑하였다. 하지만 1932년 이후부터 중앙정부의 사정이 나아지면서 난징 정부는 사천성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제스는 [[중원대전]]에서 중앙을 옹호하고 [[초공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해 사천성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는 [[류샹]]을 사천성의 지배자로 낙점하고 그에게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 1931년 6월, 국민당 3기 5중전회에서 류샹은 국민정부 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26년 충칭을 점령한 이래 국민혁명군 21군 군장으로 임명되어 안정적으로 충칭을 통치하며 다양한 재원 개발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한편 류원후이는 조세 수취에 있어서 민중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기 때문에 곧 민중의 저항에 부닥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