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궁푸 (문단 편집) === 초기 경력 === 리궁푸는 1902년 장쑤성 우진구 화이안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빈곤해서 진강에서 견습공이 되어 근근히 먹고 살았다. 이후 진강윤주중학교에 진학한 그는 1923년 우창 문화대학 부속 고등학교에 합격하여 가족과 떨어져 우창에 들어갔다. 그후 1925년 상하이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신문화운동과 [[쑨원]]의 삼민주의의 영향으로 같은 해 중국 국민당에 입당했다. 그 무렵 [[5.30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 대학 연합회에 참가하여 노동인 과장직을 맡았다. 1926년 초, 리궁푸는 학교를 떠나 광저우로 가서 국민혁명군 동로군의 총지휘부 정치부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단행한 이래 국민당 내부에서 '청당' 움직임이 일자, 그는 이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떠났다. 1928년 8월, 그는 미국에 유학가서 오리건주 레이더대학에 정치학과에서 공부하는 한편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는 유학기간 동안 미국 및 세계 각국의 교육상황을 조사, 연구했고 학교를 "사회환경 개선의 발원지"라고 여겼다. 1930년 여름 대학을 졸업한 리궁푸는 자비를 들여 뉴욕과 유럽으로 가서 서구의 교육 시스템을 조사하고 동년 겨울에 중국에 귀국했다. 리궁푸는 귀국 후 <환구신문> 시장을 맡았다. 또한 가오시치(高士其)와 함께 <서구통신사>를 기획했고 [[쩌우타오펀]], 호유지(胡愈之) 등과 함께 <생활일보>를 기획했다. 이후 1932년 잡지 <신보월간>, <신보연감>을 발간하고 <신보> 여성 직원 학원과 <신보> 유통도서관을 설립해 여성 직원들과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배려했다. 그리고 1934년 11월 10일에는 상하이에서 류식(柳湜),아이스치(艾思奇) 등과 함께 <독서생활> 간행물을 창간했다. 1936년 말, 그가 설립한 도서관의 장서가 2천여 권에서 3만여 권으로 증가했고 독자는 2만여 명에 달했는데 그 중 학생은 4500명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