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덩후이 (문단 편집) ==== 2기: 개혁의 본격화(1990년 - 1996년) ==== [[파일:052010.jpg]] (1990년 총통직에 정식 취임하는 리덩후이) 정식으로 총통에 당선 및 취임한 후, 리덩후이는 국민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반대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고, 이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내세운 정책들을 점차 받아들이면서 민주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민주진보당의 일부 인사들은 이를 두고 리덩후이가 자신들의 주장과 노선을 가로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우선 1948년에 선출된 의원이 아직도 의원 노릇을 하고 있는, [[만년국회]]라 불리던 [[입법원]]과 [[국민대회]]의 해산 및 재선거가 시급했는데, 장징궈 정권 때에도 검토가 되었던 것이지만 결국 시행하지 못했다. 장징궈가 제한적인 재선거를 용인하며 재야인사들의 정계 참여를 허용하긴 했으나 입법의원 선거가 마치 정부가 이따금씩 베푸는 수혜처럼 이뤄지는 매우 억압적인 형태였고 입법원의 존재 자체가 국민당 독재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가령 1979년 중화민국-미국 단교로 정세 불안정을 이유로 입법원 선거가 한동안 금지되는 등 그 선심성으로 조금 베푸는 선거조차 정세불안을 이유로 제대로 치러지지 못했다.] 리덩후이가 총통에 재선되자 이미 민주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국민 대회 및 입법원 의원 재선거 여론이 고조되고 [[민주진보당]] 역시 이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국민대회 및 입법원 의원들은 그 대가로 고액의 퇴직금 및 연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덩후이는 전격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학생 운동 지도자들 및 민주진보당 인사들과 회견하여, 여론 및 야당의 요구를 무기로 1991년에 [[장제스]]가 제정한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폐지하고 헌법을 수정했다[* 중화민국 헌법은 한국처럼 조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미국과 같이 수정 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특정 조항의 효력을 폐지시킬 수 있다.]. 또한 사법원에서 무기한으로 늘렸던 국민대회와 입법원의 임기를 1991년 말로 제한함으로써 1991년과 1992년에 국민 대회와 입법원은 해산되고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파일:e02_wildlily4-4.jpg]] (1990년 3월 [[중정기념당]]에서 열린 대만 재야 진영의 국민 대회, 입법원 재선거 요구 시위. 백합을 앞세웠다고 해서 '야생백합화 운동'(野百合學運)이라고 불렸다.[* 이때를 계기로 백합 꽃은 오늘날까지 범록 진영을 비롯한 대만 내 민주, 독립 계열 관련 집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이후 발생했던 대만의 주요 정치, 사회 운동에서도 꽃을 상징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했다. 예컨대 2014년 중국과의 [[ECFA]]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입법원 점거 시위는 '해바라기 운동'(太陽花運動)이라고 불렸다.] 리덩후이는 이러한 민주화 여론을 앞세워 국민당 내 입지를 강화시켰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부터 국민당 내 보수 진영과의 타협을 위해 입각시켰던 군부 출신의 거물 [[하오보춘]]을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에서 퇴진시켜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시키고, 군부의 통수권까지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오보춘이 차지했던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 직에는 자신의 측근인 [[롄잔]]을 임명하여 한층 더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4년에는 [[타이완 성]]장, [[타이베이]] 시장, [[가오슝]] 시장을 임명직에서 지역 주민의 선거를 통한 선출직으로 바꾸어 완전한 지방 자치를 실현하였다.[* 현이나 성할시 등의 기초자치단체장은 이미 선거로 선출되고 있었다. 물론 국민당 독재 시절에는 국민당만이 후보를 낼 수 있었지만, 장징궈가 민주진보당 창당을 묵인함에 따라 야당 역시 지방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총통 역시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국민당 보수파들은 이에 대해 선거인단을 통한 [[미국]]식 [[간선제]] 총통 선거를 제안했으나 리덩후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총통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총통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변경했으며 1회만 연임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20130916-05.jpg]] (1995년의 첫 [[2.28 사건]] 공식 추도 행사에 참석한 모습) 아울러 장제스, 장징궈 시절 억눌려 왔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도 단행했다. 먼저 대만 사회 최대의 금기였던 1947년의 [[2.28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지시하고, 국가 원수로서 처음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사과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조치 역시 리덩후이 스스로가 대만 출신의 본성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93년]]에는 [[시안 사건]]으로 54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던 [[장쉐량]]을 석방하였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3786630|기사]] [[1994년]] [[1월 1일]]부로 장쉐량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파일:img201208220353030.jpg]] (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 선거에서의 유세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인 롄잔) 아울러 그는 민주화와 함께 조금씩 대만 독립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1991년에 국가 통일 위원회 강령을 선포하면서 '''[[양안관계]]는 두 개의 동등한 정치 실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 정통성을 강조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양안이 똑같이 주장해오던 [[하나의 중국]]과는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로 내몰린 보수파들은 반발하여 탈당하였으며, 리덩후이도 자신의 방침에 반발하는 국민당 인사들을 제명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했다. 이렇게 제명되거나 탈당한 국민당 인사들은 [[신당(중화민국)|신당]]이라는 정당을 세웠고 1995년 입법원 총선에서 그럭저럭 선전을 거둠에 따라 리덩후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듯 싶었다. 또한 1996년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에서 제명된 린양강(林洋港)과 탈당한 천리안(陳履安)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총통 직선제에 반발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의 3선을 저지하려고 [[제3차 대만 해협 위기|대만 해협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 미사일 발사 훈련으로 촉발된 이 사건을 양안 사태라 말하며 이 양안의 충돌이 미국이 마지막으로 개입한 사태였다. 이 당시 미국은 항모 전단을 파견해 중국의 무력 시위에 맞대응했고 결국 중국이 한 발 물러서며 일단락됐으나 이를 간 중국이 10여년 뒤 내놓은 물건이 바로 [[랴오닝급]]이다.] 그러나 리덩후이는 부총통 후보로 지명한 [[롄잔]]과 함께 오히려 총통 선거 - 국민 대회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따라서 국민당이 갈라서지는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