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례쥔 (문단 편집) === 반원투쟁과 [[계축전쟁]] === 1913년 [[쑹자오런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위안스카이]]를 무력으로 토벌할 것을 주장했고 이어 [[선후대차관 사건]]이 일어나자 국무총리 [[자오빙쥔]] 등을 강력히 비난했다. 이후 그의 무력을 경계한 위안스카이에 의해 본직을 망각하고 혼란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1913년 6월 9일 면직당해 강소도독직은 리위안훙에게, 강서호군사 직은 구양무에게 내주고 도독에서 물러났으며 [[펑궈장]] 등 [[북양군벌]]의 실력자들에게 매국노라고 매도를 당했다. 위안스카이는 리례쥔에게 거금을 주며 강서성을 떠나 혁명활동을 하지 말 것을 종용했으나 거부하고 강서성에 잔류했다. 선후대차관 사건에 이어 삼독해직 사건이 벌어지자 쑨원의 주최로 상하이에서 국민당원들이 회의를 열었다. 리례쥔은 남방 각성이 호응만 한다면 자신이 제일 먼저 기의를 일으키겠다고 주장했고 이에 국민당은 리례쥔을 토원군 총사령관으로 추대, 각 성의 호응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913년 7월 12일 리례쥔이 강서성 호구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토원군을 조직, 7성 토원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였고 강서호군사 구양무를 포섭하여 강서성을 장악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빠른 반격으로 호구, 난창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다른 곳의 혁명군도 패하면서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고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정식 대총통에 취임한 이후 체포령이 하달되었다. 쑨원이 일본에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였을 때는 가입하지 않았다. 이후 이근원 등 구국민당원과 함께 운남에 들어와 반원활동을 전개하며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을 비판했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자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와 함께 운남성에서 위안스카이에게 제제를 취소하고 제제파들을 처벌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토벌하겠다고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위안스카이가 이를 묵살하자 12월 25일 [[호국전쟁]]을 일으켜 위안스카이 토벌에 나섰다. 이때 리례쥔은 2군 총사령관에 추대, 양광으로 출병했고 1916년 3월, 궁지에 몰린 위안스카이는 제제를 취소하였고 6월에 부총통 [[리위안훙]]에게 총통 자리를 물려주고 사망했다. 총통에 계임한 리위안훙은 구국회와 약법 회복을 선포하였고 이에 남방의 군무원이 해산하여 호국전쟁이 종결되었으나 리례쥔은 [[루룽팅]], [[탕지야오]] 등이 고관에 오른 것에 비해 논공행상에서 제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