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리례쥔 (문단 편집) === [[호법운동]] === 1917년 [[부원지쟁]]을 거쳐 [[장훈복벽]]이 일어난 이후 국무총리에 복직한 [[돤치루이]]가 구국회 회복을 거부하자 [[쑨원]]이 광저우로 남하,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리례쥔도 광저우로 남하하여 호법정부 대원수부 참모총장에 추대되어 광동, 운남의 군대를 이끌고 강서성을 공격했으나 패했다. 그의 부하들은 강서성에 잔류하다가 북양정부에 투항하였다. 이 때문인지 북양정부와의 화해를 도모하는 탕지야오의 뜻에 따라 1917년 11월 4일 <서남연합회 장정초안>을 작성하여 각성에게 쑨원이 대원수로 재직하는 군정부 개조를 논하기도 했으나 1920년 [[2차 호법운동]] 시작 이후 참모총장에 임명, 군사회의에 참여하여 북벌을 논했고 1922년 쑨원이 [[1차 직봉전쟁]]을 틈타 북벌을 거행하자 북벌군 중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강서성으로 진공했다. 1922년 6월 16일 [[천중밍]]이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광저우에서 축출하자 [[쉬충즈]]와 함께 천중밍 토벌에 참여했다. 1922년 9월, 구국회와 약법이 복구되고 [[리위안훙]]이 총통에 복직하자 리위안훙 총통으로부터 전국재병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고 [[2차 직봉전쟁]] 이후 [[선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북상하는 쑨원을 보좌하여 일본을 거쳐 베이징을 다녀오기도 했다. ||[[파일:손문과이열균.jpg]]|| || 1924년 11월 쑨원과 리례쥔 || 쑨원 사후 [[서산회의]]에 참석, [[서산회의파]]에 가담하여 국공합작을 반대했으나 [[국민혁명]]이 일어나자 다시 광저우 국민정부에 참여했다. 과거 운남에서의 인맥을 활용하여 [[탕지야오]]가 주월전군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차단하였으며 [[주페이더]] 등을 중국 국민당에 가입시켰다. 이후 주월전군은 건국전군으로 거듭났으며 [[양시민]] 숙청 이후 1925년 7월, [[국민혁명군]] 3군으로 재편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