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버풀 (문단 편집) == 역사 ==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맨체스터]]가 [[면직물]]을 시작으로 기계, 식품, 화학, 전자 등 전 세계 상공업의 중심 도시로 성장, 바다를 둔 인접 도시 리버풀이 그 외항으로 사용되면서 함께 성장하였다. [[19세기]]에는 세계 물동량의 절반이 리버풀 항구를 거쳤을 만큼 세계적인 무역항을 갖춘 도시였다. 21세기 지금의 유럽 최대 물동량 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다 유럽 2위인 [[독일]]의 [[함부르크]]를 합친 것보다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래서 19세기가 배경인 [[문학]] 작품에서는 배로 이동할 때 리버풀을 거치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예로 들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돌아갈 때, [[런던]]에서 더 가까운 [[브리스톨]]이 아닌 리버풀로 가려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은 예다. 이 당시 리버풀은 런던보다 부유했으며 “[[대영제국]]은 리버풀 덕에 가능했다”라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로 찬란한 역사를 가진 도시였다. 또한 [[흑인]] [[노예 무역]]의 메카이기도 했다. [[아프리카]]~[[유럽]]~[[아메리카]]를 잇는 삼각 무역의 성황에서 리버풀은 흑인 노예의 집결지 역할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도 [[레트 버틀러]]는 자신의 재산의 대부분이 이 도시에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국제 노예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인구는 1931년 84만 명을 기록했지만 이후 계속 줄어들어 2007년엔 44만 명까지 떨어졌다. [[산업혁명]] 때부터 영국 공업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2차대전]] [[독일 공군(나치 독일)|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시설이 많이 파괴되었고 전후 복구도 더뎠으며,[* 당시 리버풀의 아이들은 폭격 후 박살난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뛰어 놀았다고 한다.] 공업의 대세가 [[석탄]]에서 [[석유]]로 옮겨간 20세기 중반부터 급속하게 쇠퇴했다. 공업 물자의 수송을 담당한 것은 리버풀과 [[맨체스터]]를 잇는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였는데, 이 노선은 세계 최초로 전 구간에 기관차를 이용한 여객 및 화물 운송을 수행, 근대적인 철도 운송 시스템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러나 운송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맨체스터]]가 직접 바다로부터 [[운하]]를 판 이후로는 운송이 중단. 이로 인한 박탈감 때문에 두 도시 간의 [[지역감정]]은 꽤나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맨체스터를 연고로 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을 연고로 하는 [[리버풀 FC]]가 [[노스웨스트 더비|잉글랜드 내 최고의 라이벌]]로 꼽히는 것도 그러한 지역감정에 기반한 점이 있다. 물론 지역감정뿐 아니라 [[빅클럽]]인 두 팀이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던 경험 또한 두 팀의 라이벌 의식에 한몫했다. 상기했듯 주요 산업이 침체하면서 20세기 후반엔 잉글랜드에서 가장 쇠락한 도시 중 하나로 꼽혔을 정도로 처량한 [[암흑기]]를 보냈다. 이곳에서 당시 유학한 유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머리를 자를 돈이 없어 바리깡을 구매해 스스로 머리를 깎고 다니는 청소년들을 제법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도시가 쇠락하며 [[슬럼가]]도 생겨났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악동계의 끝판왕 [[조이 바튼]]이 회고하기를,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공격성이 있어야 된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리버풀에서 자란 축구 선수들은 대부분 억세고 파워풀한 스타일을 가졌다. [[리버풀 FC]]의 은퇴한 레전드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는 아예 악동 축구 선수로 유명한 조이 바튼과 동네조차도 똑같은 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역시 로컬 출신인 [[제이미 캐러거]]가 태어나고 자란 부틀 지역이나 [[웨인 루니]]가 태어나고 자란 리버풀 교외 크록세스 지역 역시 치안 상태가 그닥 좋진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리버풀이 아프리카나 아시아 오지, 미국의 후드 마냥 엄청난 낙후된 지역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1970-80년대의 암흑기라고 자처된 리버풀도 결국 영국 내 6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했으며, 런던, 맨체스터에 비해 많이 낙후된 것이었다는 것이지 엄청 슬럼이었다는 것은 다소 억측에 가깝다. 어쨌든 리버풀은 힘든 시간을 보냈는데, 이런 상황을 주도한 것이 [[마가렛 대처|대처]] 정부였기 때문에, 많은 리버풀 사람들은 지금도 대처 하면 치를 떤다. 덤으로 [[힐스버러 참사]]도 이 시기에 일어났기 때문에 [[리버풀 FC]] 팬덤은 독보적으로 대처를 싫어한다.[* 이 당시 경찰들이 참사의 원인을 관중들에게 전가하고 [[언론플레이]]를 했다는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훗날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공식 사과했을 정도이니 당시 정부에 책임이 없다는 소리는 못한다.] 2013년 마가렛 대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녀가 죽었다!"''''라며 환호했을 정도였다. 리버풀 시 의회가 대부분 [[노동당(영국)|노동당]]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리버풀이 이런 암흑기를 벗어난 건 21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을 포기하면서까지[* 2004년에 해양 무역 도시로 등록되었으나 개발로 2021년 7월 21일에 지위가 박탈당했다.][* 다만 문화유산 지정이 실제로 박탈당하자 리버풀 일부 시민들이 반발하는 기류도 있긴 했다.] 이른바 도시 재생 사업을 진행하면서 2천년대 이후 인구도 많이 늘었고, 경제도 대폭 성장하게 되었다. 현재는 유럽에서 문화 관광 도시로 자리잡았으며, 'Liverpool One'이란 시티 센터가 생기면서 영국 내 치안도 손꼽힐 정도로 좋아졌다. 과거의 악명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환골탈태]] 수준. 다만 외곽 지역인 스피크(Speke)나 크록세스(Croxteth), 안필드(Anfield) 지역은 지금도 치안이 조금 불안한 편이다. 이외에도 2019년 [[넷볼]] 월드컵을 개최한 데 이어 2021년 12월 11일~12일 [[G7]] 외교 개발 장관 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2023년 [[유로비전]] 개최지로 선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