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보니아인 (문단 편집) == 중세 리보니아 == [[파일:8D9399CC-AF9C-4025-879A-821C335FF088.png]] 리보니아인들은 자신들을 해안 거주자라는 뜻의 란달리스트(rāndalist)라고 불렀으며, 주로 어업과 농업, 목축업을 병행하며 살아가는 민족이었다. [[바이킹]]이 이들을 정기적으로 침략하면서 많은 리보니아인들을 [[노예]]로 잡아갔다. 독일 기사단에 리보니아가 식민지화되기 이전 리보니아인들은 [[폴로츠크 공국]]에 조공을 바치며 대신 리가 만에서 [[유럽 러시아]]로 흐르는 [[다우가바 강]](서드비나 강)을 이용하며 키예프 공국과 무역을 행했다. 당시 리브인 인구는 2만 안팎이었다. 12세기 말 독일인 선교사들이 리가 만 일대에 정착했다. 이들이 처음 짚은 타겟은 바로 이웃 [[발트어족]] 세미갈리아인의 공격에 시달리던 리보니아인이었다. 리보니아인들은 이웃 발트 부족들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이었으나 독일인이 리가 만에서 초창기 주로 조우했던 원주민이 리브인이었기 때문에 중세 동안 라트비아 일대는 리보니아로 불렸다. 1189년 독일인 선교사들은 리보니아인 추장들을 개종시킨 것으로 시작해서, 리보니아인 영토에 독일인 거주지를 세웠다. 리보니아인 추장이 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 성과는 지지부진하다는 핑계로 하노버의 베르톨트가 이끄는 소수의 북방 십자군이 1198년 리보니아의 독일인 거주지로 파견되었다. 베르톨트가 이끄는 십자군이 도착한 지 얼마 안되 리보니아인의 포위 공격을 받아 전멸하자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리보니아의 십자군을 증원할 것을 명령했고, 1199년 알브레히트 주교가 이끄는 북방 십자군이 리보니아에 들어왔다. 알브레히트가 이끄는 '''독일인들은 1201년 리가 주교구를 세웠으며, [[1202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을 창설했다.''' 이후 서유럽식 [[봉건제]]가 도입되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지역에 기사단령과 주교령이 세워젔다. 독일인 상인들이 대거 정착한 것은 덤. 농노가 된 리보니아인들은 일주일에 4~6일은 독일인 영주나 주교의 땅을 경작해야 했으며, 그 외에도 소득의 25% 가까이를 갖가지 명목의 세금으로 뜯겼다. 독일인의 식민지가 된 당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서는 독일인들은 도시 상공업자 및 지주, 원주민은 [[농노]]로 직급이 철저하기 나뉘어져 있었다. 기독교를 선교하겠다는 목적으로 들어온 리보니아 기사단은 성경을 원주민 언어로 번역하는 일에는 게을렀던 것이다. 15세기부터 17세기에는 농노의 법적 권리가 점점 제한됨과 동시에 라트비아를 일대로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전쟁을 벌이고 기근이 닥치며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전역이 쑥대밭이 되었다. 이렇게 원주민 문화와 자주성이 철저히 무시당하는 상황에서 리보니아인들은 자신의 고유 전통 문화를 서서히 상실하고 수백여년에 걸쳐 [[라트비아인]]에 서서히 동화되었다. 리보니아인 중 라트비아인들과 제일 늦게 동화되었던 사람들은 어촌 지역 주민들이었다. 이들은 [[청어]], [[대구(어류)|대구]], [[가자미]]등을 잡고 해초를 비료로 쓰는 농법으로 다른 지역 주민들에 비해 비교적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어려운 와중에도 전통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감자와 생선을 먹었다. 이 외에도 리가 인근에 거주하던 리보니아 농민들은 양봉을 해서 리가 시로 꿀을 공급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