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수용 (문단 편집) === 스위스 시절 === 스위스 근무 시절, 스위스로 유학한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을 돌봐준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맨 처음 김정남의 유학을 준비 할때 김정일이 국제부 부부장 최준덕에게 동유럽 국가 학교들을, 리수용에게 자본주의 국가 학교들을 알아보게 했고 리수용은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웨덴, 노르웨이의 학교를 죄다 수소문해서 제네바 국제학교가 가장 좋겠다는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이에 김정일은 김정남을 스위스로 유학보내면서 리수용도 서기실 부부장 겸 스위스 공사로 같이 내보냈고, 김정일 집무실 근처의 측근 전용 아파트를 하사했다. 리수용이 김정남 유학 절차를 다 해주었고, 거처도 마련했으며 이후 김정남의 통역 및 안내원을 담당했으나 1년 후에 김정남의 프랑스어가 꽤 유창해져서 이후론 김정남이 알아서 다녔다고 한다. 이후 김정철과 김정은 형제를 돌봐주었으며, 외교관들에게 생맥주도 사주고 용돈도 주는 등 매우 세심하게 외교관들을 챙겨주었고, 몇시간 씩 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조금도 졸지 않고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수시로 김정일을 만나 지시를 받았는데 90년대 초반부터 김정일의 외무성 교시는 거의 다 리수용을 거쳐 내려갔고, 리수용 본인도 김정일을 대처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김일성 뱃지를 외교관과 그 가족은 떼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 이유가 자본주의 국가에서 낡은 옷에 수령님 초상휘장을 모시기 너무 송구스러우며, 남조선 괴뢰들이 뱃지를 보고 북한인임을 파악하니까 안보상 불리하다는 것이었다. 태영호는 리수용이 감히 그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자기 자신이 김정철, 김정은을 돌보고 있는데 김일성 뱃지를 달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띠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리고 서유럽 물가를 고려하여 외교관 월급 조정도 성사해냈다. 이 시기 리수용에 대해서 대한민국 주 유엔대표부 수석대사를 지낸 박수길 씨의 회고록에도 묘사된다. 다른 북한 외교관들은 욕설질에 주먹다짐도 불사하는 불량배 수준의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스위스 대사 시절에 만난 리수용은 다른 북한 외교관들과 달리 매우 점잖아서 인상이 깊었다고 한다. 이에 박수길 대사가 리수용에게 같은 민족끼리 얘기나 하면서 지내자고 제안하자, 리수용도 선선히 응하면서 '''자기도 그 정도 힘은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박수길 대사의 관저 초대까지 받아들였는데, 만남이 이뤄지기 직전에 박수길 대사가 김일성이 6.25를 일으켰다고 비판하자 리수용이 안색이 달라져서 초대 승낙을 번복했다고 한다. 2004년 4월, 룡천역 폭발사고 이후 휴대폰 사용이 금지된 이후에 제네바 국제전기통신연맹 사무총장으로부터 이동통신망을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테러를 방지하고 사회통제에 도움이 된다는 조언을 받은 리수용은 이를 김정일에게 보고했고, 김정은을 이집트 오라스콤과의 합작으로 고려링크를 창설, 다시 북한에서 휴대폰 사용을 재개시키는데 성공하였다. 2009년 3월, 리철의 이름으로 12기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2010년 4월, 서세평에게 스위스 대사 자리를 물려주고 귀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