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승기 (문단 편집) == 생애 == [[1905년]] [[10월 1일]],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장전마을[* [[전주 이씨]] 집성촌이다.][[http://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56152|#]]에서 태어났으며, 서울 [[중앙고등학교|중앙고등보통학교]]와 [[1925년]] [[구제고등학교|마츠야마고등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공학부 공업화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이후 [[오사카]]의 고에이사와 [[도쿄도|도쿄]]의 공업시험소 연구원을 거쳐 1936년 [[오사카부]] [[타카츠키시]]에 위치한 교토제대 부설 일본화학섬유연구소의 연구강사로 재직하였다. 이 연구소에서 리승기는 사쿠라다 이치로 교수의 지도 하에, 재학 시절에 연구 주제로 삼은 합성섬유 연구를 계속하였다. 리승기가 합성섬유 연구에 착수할 당시 일본은 마침 합성섬유 개발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1930년대에 일어난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중국 침략으로 인한 대외관계 악화로 인해 자국의 주요 수출산업이었던 [[비단]]과 면직물을 수출할 시장과 원면의 수입 통로를 상실하면서, 견직물 산업이 침체했기 때문이었다. [[여담]]이지만, 1930년대 [[미국]]에서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이 개발되고 난 이후 세계적으로 합성섬유의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합성섬유 기술을 일본이 실용화함으로써 수출을 증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를 위해 일본은 1920년대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명된 수용성고분자화합물인 폴리비닐알콜(PVA. polivinylalcohol)을 이용해 합성섬유를 만들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본에서의 PVA 섬유 연구는 거대 섬유 자본의 지원 하에 세 연구실에서 독립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세 연구실 중 하나가 리승기가 있던 일본화학섬유연구소의 사쿠라다 이치로(桜田一郎) 교수팀이었다. [[1939년]] 교토제대의 사쿠라다 교수팀은 '합성1호'라는 이름의 새로운 합성섬유의 개발에 성공했음을 발표하였는데, 논문 '폴리비닐알콜계 합성 섬유에 관한 연구'에 사쿠라다 이치로 교수의 이름없이 오로지 리승기 한 사람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이후로도 '합성1호'의 공업화 연구의 중요 성과들은 대부분 리승기 한 사람의 명의로 발표되었는데, 이런 점등을 보면 리승기는 사쿠라다 교수팀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리승기는 1939년에 교토제국대학에서 PVA 섬유 연구로 조선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 공학박사 학위'''를(최초의 공학박사 혹은 최초의 제국대학 박사가 아님을 주의) 취득했으며, PVA 섬유 제조법에 관한 특허 역시 취득하였다. 한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취직이 어려웠던 그가 탁월한 연구 업적으로 일본에서 연구자의 입지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그는 즉시 교토제국대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조선인임에도 리승기의 명망은 실로 대단해서 일본과 식민지 조선 언론은 리승기가 미국의 나일론에 대항할 수 있는 발명을 했다면서 세계적 자랑이니 선풍적 혁명이니 섬유계의 혁명아니 온갖 찬사를 퍼부었으며 경성방직의 김연수가 리승기의 연구를 위해서 거액의 연구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이후 리승기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과학자들이 뭉치기 시작하였다. 리승기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했던 김종원, 박상현 외에도 리승기의 심복 중 심복이라 불리는 마형옥, 학생신분이지만 같은 교토제대 연구실에 소속된 리창직. 교토제대 연구실에서 리승기를 포함하여 적어도 5명의 조선인 과학자가 있었다. 당시 조선인 과학기술인력이 매우 적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본다면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통틀어 조선인 출신 공학박사는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으며, 일본 본토의 제국대학에서 조선인 출신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은 리승기가 유일하다. 다만 조선인 최초의 공학박사는 아니다. 1934년에 [[최황]]이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조선인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그 외에 조선인 출신의 본토 제국대학 박사로는 [[우장춘]]([[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윤일선]]([[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의학박사), [[이태규]](교토제국대학 이학박사), [[윤치형]]([[규슈대학|규슈제국대학]] 의학박사), [[장기려]]와 [[공병우]]([[나고야대학|나고야제국대학]] 의학박사), [[계응상]]([[도호쿠대학|도호쿠제국대학]] 농학박사) 등이 있다.] '폴리비닐알콜계 합성 섬유에 관한 연구' 발표 이후 교토제대 화학섬유연구소의 합성1호 연구팀에서는 PVA 섬유의 성질 개선과 공업화 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PVA 섬유는 연화점이 낮고 뜨거운 물에 닿으면 수축되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하여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되는 문제가 있었다. 또한 경제적인 생산을 하기 위해서 적은 원료로 PVA 섬유를 생산해내는 공정을 고안하는 것 역시 PVA 섬유 실용화에 있어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1940년에 발표한 두번째 논문에서는, 앞서 말한 단점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소개되었다. 열처리를 한뒤 포르말린 처리를 하여, 착색은 되나 95도의 고온의 물에서도 2.3%밖에 수축되지 않는 우수한 섬유를 만들었다고 발표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합성1호-B로 명명을 하였으며, 이후 이 합성섬유를 일본에서는 비닐론(ビニロン, vinylon), 북한에서는 [[비날론]](vinalon)으로 부르게 된다. 이밖에도 방사욕에 황산 마그네슘이나 황산 아연을 3에서 5로 통제하면 열처리를 하여도 착색이 안되는 백색 섬유를 얻을수 있다는 결과를 발표하였고, 특히 리승기 박사가 주도한 연구팀은 경화 처리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음으로 일관 공정을 만들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1942년 중간 시험장을 건설하여 중간 공정을 거친 결과, 1942년 합성 1호 중간 시험장 예비 조업 보고에서 질이 많이 좋으며 공업화가 가능하다는 시험 결과가 발표가 되었다.[* 논문에 '이상의 시험 결과에 의하여 이섬유 제품의 질이 상당히 우수하며 능히 공업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라고 되어있다.] 즉, 이미 1942년에 공업화가 이루어져도 무방한 수준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것이다. 당시 연구에 참여했던 마경석 박사는 이미 이 무렵에 비닐론 양말과 내의도 실제로 시제품을 만들어 입고 와서 보여주기도 했다고 증언을 하였다. 하지만 리승기는 [[태평양전쟁]] 중인 상황에서 본인의 연구 성과가 일본의 전쟁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을 우려하여 적극적인 상업화를 추진하지 않았고, 결국 합성1호 섬유는 전쟁 중에 양산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 와중에 리승기는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오사카 감옥에 구금되었으며, 구속 상태에서 종전을 맞았다. 광복 후 리승기는 교토제대와의 연을 끊고 마형옥, 리창직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본의 식민통치 시절부터 조선인 과학자를 대표하는 인물로 인정받아 왔기에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제2대 학장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http://eng.snu.ac.kr/node/3|#]]. 당시 리승기와 학문적 성취나 명성이란 측면에서 그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교토제대 화학과 교수로 활동했던 [[이태규]] 정도였다. 북한 지도부에서는 이런 리승기를 영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리승기의 높은 명성을 탐낸 것도 있었지만, 경공업이 취약했던 북한에게 합성섬유를 연구한 리승기라는 과학자는 꼭 필요한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해방 직후 북한은 부족한 과학기술인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건국 초기부터 과학기술자들을 우대하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중요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김일성종합대학]]과 과학원을 설립하고, 남한의 과학기술자에 대한 적극적인 월북 공작 그리고 이들을 주축으로 한 흥남공업대학의 설립 등이 바로 그 일환이었다. 또한 북한은 식민지 시절에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게 "식민지의 인텔리는 본질적으로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라며 이들의 심적인 짐을 덜어주어 해방 이후 한국의 과학기술자들이 부담감을 덜 가지고 월북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북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교육과 연구여건이 부실하였는데, 이는 서울대학교에서 일어난 [[국대안|국대안 파동]]으로 잘 드러났다. 이러한 배경에서 [[도상록]]을 비롯한 많은 과학기술자들이 월북을 선택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리승기 역시, 북한에서 파견한 산업성 대표 [[리종옥]]의 설득 끝에 1950년 7월 31일경 가족을 비롯해서 그와 친분있었던 과학자 마형옥과 리창직, 그리고 그가 서울대학교 응용화학과에서 가르쳤던 제자들과 함께 월북하였다. 월북 이후 리승기와 그의 인맥은 [[평안북도]] 청수에서 비날론 공업화 연구를 시작하였다. 청수는 평안북도 최북단에 위치한 수풍 발전소와 압록강에 인접한 지역으로, 약 40만평의 카바이드와 아세틸렌 블랙 생산 공장이 있었다. 리승기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PVA 생산 공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 카바이드 생산 설비가 필요했으며, 또한 전시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중국과 인접하면서 외진 청수에서 연구하는 것이 유리하였기에 청수는 비날론 공업화 연구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리승기 연구팀은 전쟁 중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1954년 중간 공장을 시험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중간 공장은 일일 비날론 생산량 20㎏ 규모로 출발하여 1957년에는 일일 비날론 생산량이 200㎏로 확대되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석회석을 원료로 하는 비날론 생산 공정이 완성, 1961년에는 2·8 비날론연합기업소를 설립하게 된다. 1959년 8월 2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상수여위원회 결정 제2호에 따라서 '폴리비닐 알콜계 합성섬유를 제조하기 위한 연구에서 특출한 성과'를 거두었다는 이유로 인민상을 받았다. 비날론의 생산 공정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선 석회석에서 카바이드를 얻고, 이를 물과 반응시킴으로써 아세틸렌을 만든다.[* CaC,,2,,+H,,2,,O → C,,2,,H,,2,,+CaOH] 그리고 이 아세틸렌의 일부를 아세트알데히드를 통해 아세트산으로 변환, 그리고 아세트산과 아세틸렌을 합성하여 아세트산비닐을 만든다.[* CH,,3,,COOH+C,,2,,H,,2,, → CH,,2,,CHOCOCH,,3,,] 그런 다음 아세트산비닐을 중합하여 폴리아세트산비닐을 만들고[* nCH,,2,,CHOCOCH,,3,, →(CH,,2,,CHOCOCH,,3,,),,n,, ], 이 폴리아세트산비닐을 비누화시켜 폴리비닐알콜[* (CH,,2,,CHOCOCH,,3,,),,n,, + nNaOH → nCH,,3,,COONa+nCH,,3,,OH]을 얻는다. 실제 공업화 과정에서는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밖의 다른 공정이 추가되기도. 북한에서 비날론 공업화가 결정되면서 [[비날론]]은 면 대용품으로 사용할 것을 분명히 밝혔는데, PVA 섬유가 리승기가 일본에서 연구할 당시와는 다르게 면 대용품이라는 용도로 쓰이게 된 데에는 PVA 섬유가 흡습성이 뛰어나다는 것 때문이긴 하지만, 그런 기술적 이유보다는 북한의 정치와 사회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크다. 면직물 공업과 관련 산업이 성숙했던 일본은 PVA 섬유를 면 대용품으로 사용할 필요가 적었던 반면에[* 앞서 언급한 1945년 막바지에 육군성이 PVA 섬유 생산을 지시한 것은 전쟁으로 인한 원면공급의 절대적 부족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고, 일본이 항복한 후 미국과의 관계가 호전됨에 따라 PVA 섬유를 면 대용품으로 쓸 필요가 없었다.], 북한에서는 식민지시기부터 남한에 비하여 섬유사업이 취약하였으며, 기존에 있던 섬유 생산시설 역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이런 점 때문에 북한은 면직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로운 면화 영농법을 보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북한의 한랭한 기후에서 면화 생산량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비날론을 면직물 대체품으로 사용하려한 것이다. 또한 북한 지도부는 [[소련]] 중심의 국제분업체계에서 벗어나 자립적 공업화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북한에 풍부한 석회석을 원료로 여러 유기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비날론 공장을 통해 화학공업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 즉 중공업 설비를 건설하면서도 섬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승기 박사 본인은 당시에 무리하게 신기술을 적용시켜 건설하려는 [[순천화학련합기업소|순천비날론련합기업소]]의 건설을 중간 공정을 거친 뒤 하자는 입장이었고, 석탄 화학 못지 않게 석유 화학도 중요하다는 사실까지 통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이라는 사회의 특성상 수령이 [[까라면 까]]야하는 입장이었고, 현실적으로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이 한창 사회에 진입할때라 직물 생산도 빨리 늘려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 이 당시 북한에서 옷도 북한에서 배급하는 물품이었는데(물론 이때도 모자라는 여분의 옷은 [[장마당]]이나 [[백화점]]같은곳에서 구매하기는 했다.) 옷생산을 늘리려면 국가적인 차원에서 비날론 공장을 늘리는것이 필수였기는 했다. 문제는 정상적으로 만들었어도 괜찮을 것을 무리하게 신기술 적용시키겠다며 예산을 날려먹은것이지만.] 무리하게 목표에 직잡하여 그의 고견이 묻힌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