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용무 (문단 편집) === 초기 이력 === [[1925년]] [[1월 25일]], 평안남도 평성시에서 출생했다. 김일성의 사촌여동생인 김정순과 결혼하여 성분이 매우 좋은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1947년 6월에 중앙경위대에 입대하였으며 이후 제2중앙정치학교를 졸업하였다. 중앙정치학교 졸업 이후 군사정치일군으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총정치국]]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사단 정치부장, 사단장,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총정치국]] 조직부장, 조직부국장을 거쳐 1964년 6월에 민족보위성 총정치국 제1부국장에 임명, 중장으로 진급했다. 박병엽의 증언에 따르면 총정치국 부국장 재임 시절 [[김창봉(북한)|김창봉]], [[허봉학]], 김정태 숙청에 매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자격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8월, 군 상장으로 진급, 총정치국 국장으로 진급했다. 1974년 6월에는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권의 최상층부로 진입하였다. 1974년 2월 장길부 장의위원, 1976년 3월, [[남일]] 장의위원, 1976년 5월, [[홍원길]] 장의위원,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강명도의 증언에 따르면 창광산에 호화저택들을 지어놓고 김정일에게 군악단의 미녀들을 바치면서 아부하였으며 사석에 있을때 김정일과 말을 놓을 정도로 그의 최측근이 되었다고 한다. [[이한영]] 역시 리용무가 [[김정남(북한)|김정남]]의 생일파티에 초대받을 정도로 김정일과 가까웠다고 증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