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지선 (문단 편집) === [[반장전쟁]] === 1928년, [[후한민]]과 [[쑨커]]로 대표되는 국민당 재조파가 조직되자 이들에게 재정적인 원조를 제공하였다. 1928년 7월, [[탕산회의]]에 참석하였다. 1928년 국민당 2기 5중전회에서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폐지한다는 결정이 내려지자 리쭝런과 함께 격렬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며 삼전대회에서 정치분회 존폐를 결정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편견 문제 때문에 각 집단군 사령관들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항저우로 떠나버렸으나 1928년 9월의 국민정부 조직에 참여, 군사위원회 1대 참모총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 12월, [[편견회의]]에 참가하여 편견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국방위원회 위원장, 편견회의 상무위원, 편견회의 집행부 주석, 육군군관학교 운영위원 등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1929년 1월, 편견회의를 이탈하여 상하이로 떠나버렸다. 1929년 2월, 우한정치분회 주임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으로 해임시키고 [[허젠]]을 후임으로 임명한 [[호남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의 요청을 받고 광서파와 난징 정부를 중재하기 위해 3월 12일, 난징으로 왔다. 하지만 3월 들어 리쭝런의 부하 섭기와 하위가 군사행동에 돌입, [[1차 장계전쟁]]이 폭발하자 장제스는 3월 21일, 리지선을 우한과 내통한 혐의로 기습적으로 감금하고 3월 26일, 광동성 정부주석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해임시켰다. 이에 따라 [[천밍수]]가 신임 광동성 정부주석에, [[천지탕]]이 광동성 군사령관이 됨에 따라 광동성의 지배자는 리지선에서 천밍수와 천지탕으로 바뀌었다. 천지탕은 8로군 사령관에 취임, [[리쭝런]], [[바이충시]], [[장파쿠이]] 토벌에 나섬으로 난징 정부의 후방을 굳건히 하였다. 이 사건을 두고 [[펑위샹]] 등은 자살행위라 부르면서 격렬히 반발하였으며 결국 [[중원대전]]이라는 중국 역사상 최대 내전으로 번졌으나 장제스는 [[봉천군벌]]의 수령인 [[장쉐량]]의 도움으로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의 연합군을 모두 격퇴했다. 이후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영구제명 처분을 받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