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지선 (문단 편집) === 말년 === ||[[파일:모택동과이제침.jpg]]|| || 마오쩌둥과 담소하는 리지선 || 1954년 9월 15일, 베이징에서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 회의가 열리자 대회 주석단으로 선출되었으며 대회 결과 쑹칭링, 임백거, 장란, 나영환, 심균유, 곽말약, 펑전, [[달라이 라마 14세]] 등과 함께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54년 12월 정협 제1기 전국위원회 상무위원회 확대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정협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56년 중국 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여, "우리의 이 선물은 우리 여러 민주당파가 중국 공산당의 영도 아래 역경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번영하고 행복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회로 승리적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상징한다."라고 축사를 낭독했다. 1957년 백화제방 백가쟁명 운동이 벌어지자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3월 1일부터 인민 내부 모순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문제에 관한 토론에 참여했다. 1958년 제1기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소집되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에 다시 선출되었으며 정협 제3기 전국위원회 부주석으로 재선출되었다. 1959년, 베이징에서 위암과 혈전 증상으로 사망하였다. 아들 리페이야오(1933년생)도 국민당 혁명위원회 소속으로 1990년대 주석에 올랐고, 중국 정협 부의장까지 오르는 등 중공정권하에서도 어느정도 대접을 받았으나, 1996년 자택을 지키던 [[인민 무장 경찰]] 소속 경호원이 강도로 돌변, 어처구니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문에 무경 사령관을 비롯한 수뇌부는 줄줄이 옷을 벗었고, 장쩌민은 민심수습을 위해 [[엄타]]라는 범죄와의 전쟁을 개시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