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진수 (문단 편집) == 생애 == 1920년 9월 11일 함흥시 성천구역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건축공사장에서 일하다가 1940년부터 흥남비료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안전 및 검찰 부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고 하며 량강도 정치보위 업무를 책임지는 자리까지 갔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중요직책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1955년 3월, 로동신문에 <미제와 리승만 역도가 빚어낸 참상>이란 논설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1956년 [[김정일]]이 혁명 전적지 답사단을 꾸리고 량강도와 백두산 현지지도를 갔을때 자처하여 일군들을 모아놓고 현지답사를 돕는 한편 김정일이 머무르던 여관을 직접 경비하면서 김정일에게 엄청난 아부를 하였고 덕분에 김정일의 눈에 들게 되었고 리진수 칭찬을 많이 하였다고 한다. 이후 1957년 최고검찰소 부소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조선민주법률가 협회 부위원장을 지냈으며 1965년 3월 <남조선 녀성에게 민족적 모욕을 가한 미제 야수들은 인민의 심판을 면치 못할것이다>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1970년 중장계급을 받고 사회안전성 제1부상에 임명되었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 출석, 사회안전기관을 대표하여 토론하였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국가정치보위부가 신설됨에 따라 전임 사회안전부장 [[김병하(북한)|김병하]]가 초대 보위부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973년 2월 20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이 발표됨으로 리진수가 후임 사회안전부장에 임명되었다. 1973년 9월, 조선로동당 5기 7중전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되었다. 북한 측의 선전을 보면 김정일이 불시에 지하철 건설 현장에 나타났을때 이를 제때 모시지 못했다고 자책했다고 하는 걸 봐서는 사회안전부장 시절 [[평양 지하철도]] 건설도 감독한 것으로 보인다. 1976년 12월 25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최원익]]에게 사회안전부장 자리를 내어주고 [[정동철(1909)|정동철]]의 뒤를 이어 중앙검찰소장으로 이동하였으머 1977년 12월, 6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으로 재선되는 한편, 중앙검찰소장에 유임되었다. 또한 법안심의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78년 최원익이 사회안전부장에서 밀려나면서 다시 사회안전부장을 맡게 되었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일성이 직접 리진수를 불러서 자리를 맡겼다 카더라.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도 사회안전기관을 대표하여 토론자로 출석했으며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1980년 12월 조선로동당 6기 2중전회에도 출석, "사회안전기관들은 당과 혁명을 튼튼히 보위하며 근로인민대중의 리익을 철저히 옹호하자"라는 보고를 올렸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김일성 훈장, 국기훈장 1급, 자유독립훈장 1급 등 여러 훈장도 받았다.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및 법안심사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또한 [[최현(북한)|최현]] 장의위원에 위촉되었다. 1984년 [[리철봉]]에게 사회안전부장 자리를 물려주고 숙청당한 김병하의 뒤를 이어 2대 국가안전보위부장으로 이동하였다. 김정일이 리진수를 따로 불러내어 "혁명의 천만리길을 함께 가자"라고 해주었다고 한다. 1984년 3월 [[김일(1910)|김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4년 김일성의 [[동독]] 방문을 수행하였다. 1986년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재선되었다. 1987년 8월 23일 오후 6시 40분에 심장마비로 갑작스럽게 사망하였고 북한은 당중앙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의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하여 "리진수동지는 안팎의 원쑤들의 온갖 책동으로부터 우리 당의 통일단결을 눈동자와 같이 지키고 주체사상에 기초한 전당과 전체 인민의 정치사상적 통일을 반석같이 다지며 우리 당의 혁명위업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왔다. (...) 리진수동지는 당의 유일사상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혁명적 수령관을 확고히 세워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당과 혁명위업에 무한히 충실하였으며 일편단심 우리 조국의 안전과 인민의 행복을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라고 침이 마르도록 리진수를 칭송하였다. 북한 선전에 따르면 김정일이 빈소를 새벽 2시에 방문해 "리진수 동무는 일을 잘하였다. 정말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라고 유가족들에게 교시하였다 카더라.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으며 공화국영웅 칭호가 추서되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 개회사에서 김정은은 '혁명무력의 강화발전을 위한 투쟁에서 영웅적 위훈을 세운 귀중한 선군혁명전우'로 [[조명록]], [[김광진(1927)|김광진]], [[김두남]], [[전재선]], [[윤치호(1928)|윤치호]], [[리동춘(1933)|리동춘]], [[김하규]], [[심창완]]과 함께 리진수를 언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