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쭝런 (문단 편집) === [[초공작전]]과 양광사변 === 하지만 1931년 2월, 장제스가 입법원장 [[후한민]]을 감금시킨 [[탕산 사건]]을 계기로 기존에 장제스를 지지하던 광동파들이 대거 반장파에 가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5월 3일]] 광동의 실력자 [[천지탕]]이 장제스의 탄핵을 요구하는 반장통전을 발표하자 광동파의 전에 없는 결집을 보고 놀라고 있던 리쭝런은 [[5월 11일]], 천지탕에 호응하여 장제스 탄핵을 요구했다. [[5월 27일]], 서산파, 개조파 등의 반장파들이 광저우에 집결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 장제스 토벌을 선포하여 [[1차 양광사변]]이 발생하자 [[6월 2일]] 광저우 국민정부 산하 4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이후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에게 호남성 주석 자리를 보장할 테니 광저우 국민정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지만 허젠은 거부하고 중앙에 복종했다. [[1931년]] 9월, 광저우 국민정부군이 북상했으나 호남 전선에서 회군해버렸다. 부로가 며칠 후인 [[9월 18일]] [[만주사변]]이 발생하여 거국적인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난징으로 진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가 초공과 항일을 영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쑨커와 왕징웨이 모두 그렇게 하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반대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왕징웨이와 함께 장제스의 하야를 강경하게 요구하여 장제스가 "왜구들에게는 사사건건 양보하고 비위를 맞추면서 안으로는 고압적 자세를 취한다"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결국 [[12월 25일]] 장제스가 하야하면서 [[12월 28일]]에 열린 4기 1중전회에서 국민당 중앙감찰위원, 서남정무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파일:이종인과장개석.jpg]]|| || 1936년 9월 17일, 광저우에서 장제스에게 경례하는 리쭝런 || 이후 4기 1중전회의 결정에 따라 양광 지역에 중앙집행위원회 서남집행부, 서남정무위원회, 군사위원회 서남분회를 설치하여 광서지역에서 반독립적인 지위를 누렸으며 [[1933년]] [[복건사변]]이 일어나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제5차 초공작전]]이 일어난 이후 1934년 6월 허젠이 찾아와 호남에 10개의 비행장을 건설하여 적극적으로 초공작전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에 동의하였다. 1934년 홍군이 [[대장정]]에 오르자 상강에서 홍군을 공격해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그의 광서왕 놀이도 슬슬 끝물에 이르렀다. 1932년 1월 [[장왕합작]]으로 권력에 복직한 장제스는 서남정치분회 취소, [[법폐개혁|화폐개혁]], 광서군벌의 주 수입원인 [[아편]] 단속을 통해 차차 광서군벌을 압박했고 1936년 5월, 양광지역의 정신적 지주인 [[후한민]]이 사망하자 리쭝런은 장제스가 자신들을 토벌할 것이라 여겨 6월, 월계군벌 [[천지탕]]과 힘을 합쳐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항일을 구실로 호남에 출병하여 장제스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켰지만 천지탕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순식간에 몰락했고 9월에 협상을 통해 장제스에게 항복하고 광서의 통치권을 보장받았다. 그해 12월, [[서안 사건]]이 터졌을 때는 공산당 토벌을 주장하는 강경파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