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리쭝런 (문단 편집) === [[국공내전]]과 미국 망명 === 1947년 11월 15일 [[국민대회]] 개막 이후 11월 22일 [[장제스]], [[쑨커]], [[바이충시]], [[위유런]], [[후스]] 등 46명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1948년 4월 23일 오전의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부총통 후보 선출]]에서 754표를 얻어 부총통 후보가 되었는데 그 외의 후보로는 [[쑨커]], [[위유런]], [[청첸]], 모더후이, 서부림이 있었고 이 중에서 제일 많이 표를 얻은 리쭝런, 쑨커, 청첸 세 사람이 결선투표에 참여했다. 4월 24일, 리쭝런이 1100표, 쑨커가 900표, 청첸이 600표를 얻어 4월 28일 3차 투표를 실시했다. 이때 리쭝런이 1156표, 쑨커가 1040표, 청첸이 515표를 얻어 계속 과반수 득표에 실패했다. 이에 4월 29일의 투표에서 청첸을 제외하고 리쭝런과 쑨커가 결선투표에 들어갔다. 장제스는 쑨커를 부총통으로 지지했으나 미국 대사 레이튼 스튜어트 등이 장제스를 싫어하여 리쭝런을 원조하였고 리쭝런이 내건 정치혁신 구호와 좌우를 가리기 위해서는 입후보 사퇴를 할 수도 있다는 겸손한 자세가 상당한 지지를 얻은 덕분에 4월 29일, 2766표 중 1438표를 얻은 리쭝런이 중화민국 초대 부총통에 당선되어 1948년 5월 20일 취임하였다. 이후 요심전역, 회해전역 등에서 국민정부군이 참패하여 48년 9월에 쉬저우가 함락되고 난징까지 위협당하자 바이충시, 청첸 등과 함께 장제스 하야를 압박하였다. 11월에 [[웡원하오]] 내각이 사퇴하였고 계속되는 하야 요구에 장제스는 1948년 12월 31일, 난징의 총통 관저에서 리쭝런, 쑨커 등 당정의 요인 40여명을 소집하여 자신의 하야에 대해 물었고 상당수가 장제스의 하야에 찬성하자 1949년 1월 1일 신년사에 평화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거취를 생각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1월 21일 하야하면서 리쭝런이 총통 대행이 되어 중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리쭝런은 중공과의 화의를 주장, 1월 22일 평화회담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장강을 경계로 천하를 남북으로 분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리지선 등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인물들을 초빙하는 한편, [[행정원장]] 쑨커에게 각지의 초비총사령부를 군정장관공서로 개편, 전국의 계엄령 해제, 감란건국총대 폐지, 정치범 석방, 감란에 저촉되어 폐간된 신문, 잡지 발행 허가, 특별 형사법정, 특별형사조례 취소, 특무활동 중지 등을 지시했다. 또한 1월 27일 마오쩌둥에게 담판장소를 정해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2월 1일 자기 자신이 상하이로 가서 간제허우, [[옌후이칭]], 장사조로 구성된 대표단을 조직해 담판을 시도했으나 중공은 리쭝런에게 전범 처벌, 헌법 폐지, 중화민국 법률 폐지, 민주원칙에 의한 정부군 개편, 관료자본 몰수, 토지제도 개혁, 매국조약 폐기, '반동분자'를 배제한 정치협상회의 소집과 민주연합정부 해체를 비롯하여 무조건 항복에 가까운 조건을 강요하였다. 리쭝런은 2월 1일, 중앙당부를 광저우로 옮기고 2월 5일에 수도를 역시 광저우로 옮겨 난징 함락에 대비하는 한편 중공과의 평화회담에 매달렸다. 3월에 행정원장 쑨커가 사직하자 리쭝런은 [[허잉친]]을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했으나 베이핑으로 간 대표단들마저 중공에 줄줄이 투항하고 4월 20일 중공군이 장강을 남하하여 난징을 공격하는 등 전황은 악화될 뿐이었다. 결국 4월 22일 리쭝런은 장제스에게 총통 복직을 청했으나 장제스는 거절했다. 이에 리쭝런은 4월 23일 난징을 떠나 광저우로 가면서 군사권의 전권 부여, 대만으로 옮겨간 금, 은, 외화의 환송, 대만으로 옮겨간 무기의 환송, 모든 군사기관은 국방부장에 복종, 국민당의 정책결정권 박탈 등을 장제스에게 제안했으나 장제스는 당연히 이를 따르지 않았다. 5월 24일 상하이가 함락되자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리쭝런의 요청을 묵살했다. 상하이 함락에 책임을 지고 허잉친도 사퇴하고 리쭝런은 [[쥐정]]을 새로운 행정원장으로 지명했으나 5월 31일의 투표에서 임명안이 부결되어 다시 [[옌시산]]을 행정원장에 임명, 6월 3일 투표에서 임명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10월에 광저우까지 위험해지면서 리쭝런은 충칭에서 같이 사천 방위에 대해 논하자는 장제스의 제안을 뿌리치고 심해지던 장출혈 치료를 이유로 11월 20일 [[영국령 홍콩]]으로 떠나 신병 치료와 미국의 원조를 구하겠다고 미국행을 선언했다. 이에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는 [[쥐정]] 등을 홍콩으로 파견해 리쭝런에게 충칭으로 돌아와 정부를 지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리쭝런은 이를 거절하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든 못받아내든 1개월 안에 귀국하여 공산당과 싸우겠다고 공약하고 12월 8일 미국으로 떠나 기독교장로회 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는 뉴저지에 체류했다. 1950년 2월 3일, [[국부천대]]를 단행한 국민대회 대표들은 연명으로 장제스 복직을 요청하였다. 2월 12일, 감찰원은 리쭝런 탄핵안을 가결하고 국민대회에 리쭝런을 탄핵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2월 12일, 국민당 비상위원회는 리쭝런에 조속히 귀국할 것을 청하였고 2월 21일, 3일안에 귀국하지 않으면 리쭝런의 총통대행직을 박탈할 것이며 장제스에게 복직을 청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리쭝런은 따르지 않았다. 리쭝런은 미국에 체류하면서 맹우인 바이충시에게 미국 망명을 권했으나 바이충시는 따르지 않고 대만으로 건너갔다. 1950년 3월 1일 장제스가 권력에 복직하자 장제스에게 전화를 걸어 장제스의 복직은 헌법 49조를 위반한 것으로 부총통이 결위되었을 시에는 행정원장이 대행하며 입법원이 새로운 총통을 선출하는 것이 헌법에 맞는 조치라고 직접 격렬히 항의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그의 항의를 묵살했다. >"내가 총통의 직무에 복귀한 것은 국민대회 대표들의 건의에 의한 것이고 각 방면의 간절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군중들의 뜻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미국에서 장제스를 막을 수단은 없었고 [[제2대 대만 정부총통 선거|1954년 국민대회]]에서 탐오하고 나라를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탄핵안이 제출되었다. 1950년에 제출된 탄핵안은 1952년 감찰원 통과 이후 국민대회에서 부결되었으나 이번 탄핵안은 국민대회에서 1468표 중 1403표의 찬성으로 통과됨에 따라 천청에게 부총통 자리를 내주게 되면서 공직을 잃었다.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장제스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리쭝런회고록을 집필했는데 현대 중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여겨진다. 하지만 한국에 정발된 적은 없으며 현재는 원서로조차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한편 이 리쭝런회고록에서 리쭝런은 장제스의 복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장선생의 복직은 결코 나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상 그는 일찍이 이미 대만의 독재자였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굳이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질책을 한 이유는 대리총통의 신분으로서 적어도 반역을 없애야 한다는 나의 입장을 표시함으로써, 국가의 법통을 위하여 일말의 존엄을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