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효순 (문단 편집) === [[갑산파 숙청 사건|갑산파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갑산파 숙청 사건)]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상무위원회]]가 신설되면서 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제도가 비서국으로 개편되면서 대남비서로 유임되었다. 1966년 12월, <어둠을 뚫고>란 영화를 만들었는데, [[김일성]]으로부터 계급성이 모호한 별난 영화라는 비판을 받았다. 1967년 3월, [[리봉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대남총국장으로 계속 자만해져 공적 쌓기에 혈안이 되었으며 계속해서 남한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였는데 이들을 접대한다는 구실로 평양 교외 저수지에 2층 별장을 지어놓고 자신의 개인별장으로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조직지도부장으로 2인자로 급부상하고 있던 김영주와의 마찰이 커졌다. 여기에 동독 사회주의통일당 당대회에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파견되었다가 소련을 마구 비난하고 중국을 찬양하여 동독에서 기겁하는 등 외교적 문제도 여럿 일으켰다. 그런가 하면 1967년 5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는 갑산파 [[허석선]]이 중앙위원회 부부장으로 추천되자 김일성은 허석선이 밀고자 혐의가 있다고 거절하였는데, 이에 리효순이 책상을 탁 치면서 왜 생사람을 잡느냐고 소리를 지르면서 대들기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1967년 5월 25일, 조선로동당 4기 15중전회에서 박금철과 함께 김일성의 극심한 비판을 받고 숙청당했다. 공작원 김진계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대남공작 전략, [[이수근(북한)|이수근]] 사건 등을 추궁당했고 박금철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잘못을 빈 것과 달리 리효순은 보안사안이다, 남조선 문제는 나의 담당이다 라고 김일성에게 맞섰다고 한다. 갑산파는 자신들이 김일성의 뒤를 이은 확고한 2인자라고 망상했지만 김일성은 그딴거 키우는 사람이 아니었고 일본에 갔을때 사업상 만난 일본인들과 조총련에게 많은 뇌물을 요구한 일, 자신이 남조선 담당이니 북조선을 담당하는 김일성과 대등한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일이 추궁당해 완전히 숙청당했다고 한다. 이후 양덕군 가구공장 4급기업소 부지배인 혹은 평남 성천군 농기계작업소 부지배인으로 좌천당했으며 후임 총국장에는 총정치국장인 [[허봉학]]이 임명되었다. 1968년 4월에 출당, 이후 종파주의자 교양소로 보내져서 1970년대 초에 사망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