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린썬 (문단 편집) === 중화민국 정부주석 === 1929년 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적을 박탈하기로 했던 광저우 당중앙의 처분이 공식적으로 철회되었다. 1931년 2월, 장제스는 합작 관계이던 입법원장 [[후한민]]을 약법 제정과 관련한 의견 충돌 끝에 [[탕산 사건]]을 일으켜 감금하자 광동파, 개조파, [[서산회의파]]가 연대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켜 장제스에게 대항했다. 린썬 역시 후한민의 감금에 반발하여 4월 30일 중앙감찰위원 등택여 등과 함께 장제스를 탄핵했다. 1931년 6월 1일 훈정 시기 약법의 반포 이후 6월 13일 3기 5중전회에서 입법원 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때 정부주석이었던 장제스는 [[제3차 초공작전]]과 [[1차 양광사변]]에 동시에 대응해야 했는데 9월 18일 [[만주사변]]까지 일어나면서 결국 난징과 광저우의 통합을 위해 12월 15일 하야했다. 1931년 12월 28일 4기 1중전회는 명망이 높던 린썬을 주석, [[탕사오이]] 등 33명을 국민정부위원, [[쑨커]]를 [[행정원장]], [[천밍수]]를 행정원 부원장, [[장췬]]을 [[입법원]]장, [[다이지타오]]를 고시원장, 우차오수를 [[사법원]]장, [[쥐정]]을 사법원 부원장 등으로 임명하고 쑨커 내각을 출범시켰다. 린썬은 1932년 1월 1일 국민정부 주석에 취임했고 쑨커 내각이 정무를 보았으나 쑨커는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와중에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임했고 장제스와 왕징웨이과 [[장왕합작]]을 형성함에 따라 행정원장에 왕징웨이, 군사위원장에 장제스가 취임하였다. 이후 1935년까지 국민정부 주석으로 임기를 수행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장제스와 왕징웨이, 그 중에서도 장제스에게 있었고 린썬은 [[난징]]에 있는 국민정부(후에 [[난징 총통부|총통부]])에 발도 들여 놓지 ~~못했~~않았다. 왜냐하면 그 곳은 여전히 장제스가 쓰고 있었으니까. [[타임(주간지)|타임]] 지는 1934년의 한 기사에서 대놓고 장제스의 [[꼭두각시]]로 지칭하였다. 1935년 12월에 두번째 임기가 만료되어 사퇴해야 했지만, 5기 1중전회가 린썬의 임기를 헌법이 반포될때까지 연장하도록 결의하면서 퇴임이 미루어지게 되었다. ~~그래봤자 장제스의 허수아비여서 의미가 없었다.~~ || [[파일:external/imgtu.lishiquwen.com/3e3f32b26ca9c90aadae714d439d20bd.jpg|width=100%]] || || 린썬과 장제스 ||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대국민 연설을 하면서 국민들의 지지와 결집을 호소했다. 11월 16일, 충칭으로 이동하기 직전 장제스에게 자신은 이미 늙었으니 살아서 다시 난징을 밟기 어려울 것이라며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수집품은 박물관에 기증하고 현금은 양자와 양손에게 주며 은행예금은 유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부탁하고 다음날인 11월 17일 충칭으로 올라가는 군함에 올라탔다. 12월 26일, 충칭에 도착한 후 국가주석으로 정무를 보았다. 1938년 [[왕징웨이 공작]]에 포섭된 왕징웨이가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 린썬에게 난징으로 돌아와 일본에 협력할 것을 촉구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하고 충칭에서 항일전쟁을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