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낙길(배구) (문단 편집) == 선수 시절 == [[파일:마낙길.jpg]] 배구선수로서는 단신인 186cm임에도 뛰어난 점프력을 앞세워 제천광산공고에서 맹활약하면서 1987년 한국 남자 배구가 세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할 때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그 때 같이 활약한 동기들이 [[이성희(배구)|이성희]] 전 [[대전 KGC인삼공사|인삼공사]] 감독, 김은석 전 고려증권 센터, [[서남원]] 전 [[대전 KGC인삼공사|인삼공사]] 감독이었고, 이들 모두 배구계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 자리 잡았다. 마낙길 역시 [[성균관대학교]]로 진학하여 팀의 주포로 활약하면서 대표팀에도 발탁되는 등 [[대한민국]] 배구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로 인정받았다. [[1990년]] [[성균관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고려증권 배구단|고려증권]]과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서비스]]와의 치열한 스카우트 전쟁 끝에 2억원[* 당시 아파트 10채를 살 수 있었던 거금이었다고 한다.]에 가까운 계약금을 받고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서비스]]에 입단했다. 1991년 신인 첫 해부터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하종화]], [[임도헌]]과 함께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서비스]]와 슈퍼리그의 전성기를 이끌며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였고, 1991년부터 1996년까지 베스트 식스를 6회 연속 수상해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서비스]]에서 주포로 활약했지만, 문제는 혹사에 따른 고질적인 허리 부상. 고교 시절부터 주니어 대표를 비롯해 팀에서 활약하면서 소위 [[몰빵배구|몰빵]]을 경험해야 했던 마낙길의 몸이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 자체가 짧아졌다. 186cm의 단신 공격수인 그가 점프력을 잃었으니, 배구선수로서의 생명력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 때문에 [[상무 배구단|상무]]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후, 30세가 된 1997년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배구계를 떠났다. 1996 슈퍼리그 결승 제4차전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현대자동차서비스]] vs [[고려증권 배구단|고려증권]]의 명승부 게임에서 레프트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youtube(1k1D-Vxjch0,width=640,height=36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