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녀사냥 (문단 편집) === 마녀사냥의 종결 === 일련의 종교 광기는 17세기 들어서 회의론이 점차 싹트기 시작한다. [[르네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근대적인 철학 사상과 과학이 본격적으로 발전되어 종교를 향한 의존도가 서서히 감축하며 이성적 사고가 자리잡게 되고, 정치상 또한 지긋지긋한 종교 갈등이 일단락되었으며[* [[30년 전쟁]]의 종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이 등장한 근대사의 변곡점으로 거론되는 시점이다.] 왕권 확장에 걸림돌이 되는 종교가 왕정과 대립하기 시작하면서 지방 독자적인 판결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루이 14세]] 또한 칙령으로 사법 개혁을 단행하여 직접 마녀사냥을 옥죄기 이르렀고 지방의 독자적인 재판 감시를 강화시키면서 무고한 판결을 몸소 척결해나가기 시작했다. 18세기가 되어서는 절대 왕정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지만, [[리스본 대지진]]과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계몽주의]] 철학이 대세로 자리잡으며 기성 교회가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며 본격적으로 척결되기 시작한다. 사법체계도 점차 성숙을 거듭하며 [[죄형법정주의]]와 입증주의가 토양으로 깔리게되고 [[사적 제재]]나 [[작은 사회]]의 독자적인 판결에 환멸감이 퍼지면서[* 이 마녀사냥의 끔찍한 경험 때문에 현대의 유럽 지역에서는 '[[작은 사회]]'에 대해 의외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다. 더불어 교회에 대한 반발감도 심해져 현대 서구사회에서 무신론이나 반신론, 신이교도주의가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마녀사냥은 사실상 종식을 맞는다. 마녀사냥의 몰락에 쐐기를 박은 트리거로선 [[1751년]] 발생한 '오스본 사건'의 판례가 결정적이었다고 거론된다. 콜리라는 한 시민이 평화롭게 지내던 오스본 부부를 젊어보인다는 이유로 마녀로 지목하고선 갖은 물고문끝에 부인이 익사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이렇게 마녀라는 누명은 죽음으로 벗겨졌지만, 죽은자는 살려낼 수 없었고 본래 관행대로였다면 [[아님 말고]] 식으로 넘어갈수도 있을 사안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근대적인 사법 체계가 이미 뿌리내리던 시절이었다. 결국 콜리는 기소되었고, 마녀라는 확실한 물증을 입증하질 못해 입증주의에 의거 [[살인죄]]가 인정되면서 '''사형'''이 판결되곤 그렇게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이는 입증주의의 귀감이 되는 최초 판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입증주의란 모르쇠였던 마녀사냥은 법치라는 이름 아래 사멸하게 된것이다. 2003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녀사냥을 교회의 잘못으로 인정하면서 크리스트를 대변하며 사과를 표했고 종교 내부에서도 반성점으로 여기는 모습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