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녀사냥 (문단 편집) === 근세: 마녀 사냥의 절정기 === >마녀를 가장 맹렬하게 박해한 1570~1630년은 신교 국가들과 가톨릭 국가들이 교파화되고 이데올로기 전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기간이기도 했다. (중략) 가톨릭교도들과 신교도들 중에 어느 쪽이 박해에 더 열을 올렸느냐는 것은 이견이 분분한 문제다. 박해자들 중에서도 최악은 대게 독일의 작은 영역을 통치한 가톨릭 주교들이었다. 일례로 뷔르츠부르크의 주교 율리우스 에히터 폰 메스펠브루니(Julius Echter von Mespelbrünn)은 가톨릭 개혁의 강경파로서 1616~1617년에 마녀를 300명 넘게 화형시켰다. 그러나 가톨릭 남유럽은 처형률이 가장 낮은 축에 들었고, 에스파냐 종교재판소는 로마 종교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마녀들이 저지른다는 소행에 회의적이었다. 칼뱅의 제네바에서는 화형당한 마녀가 거의 없었고, 신교권 네덜란드와 칼뱅파 팔츠에서는 사실상 마녀 재판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다른 칼뱅파 지역들은 1660년대까지 계속하여 마녀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전반적으로 마녀 재판이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이스트앵글리아에서 내전 막바지에, 루터파 스웨덴에서 1668~1676년에, 그리고 유명한 사례로서 미국으로 건너가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에 정착한 청교도 공동체에서 1692년에 추악한 마녀 재판이 발생했다. 마녀 재판을 종식하는 데는 다수 요인들이 함께 작용했다. 다양한 법률 체계들이 도입된 더욱 엄격한 증거 기준, 고문 제한, 과학적 회의주의, 비열한 마을 주민이 광분해서 제기하는 고발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엘리트주의적 태도 등이 그런 요인들이었다. 그러나 더 넓게 보면 이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들은 종교 전쟁의 종결과, 다원주의를 향해 절뚝거리며 나아간 발걸음이었다. 유럽 사회들이 실제 "타자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 통합함에 따라 상상 속 타자들은 더이상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 엄밀하게 균일한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하고 다른 무언가를 우연히 낳아주는 데 성공했음을 말해주는 또 다른 증거다. >---- >「종교개혁」, Peter Marshall[* 영국 워릭 대학 역사학과 교수] >'''가톨릭교와 신교는 과격한 종교적 수사법을 곧잘 구사하면서도 좀처럼 서로를 마녀술 혐의로 고발하지 않았다.''' 마녀들의 주된 죄목과 종교개혁의 주요 논쟁 사이에 직접적 연관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부터 마을 주민들은 반사회적인 늙은 여자들이 주술을 걸고 고약한 저주를 내린다고 항상 의심했지만, 공식 박해에 시동을 건 동력은 마녀들이 악마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악마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 사회와 전쟁을 벌이는 대규모 배교자 군단이라는 의심을 굳혀간 신학자들의 확신이었다. >---- >「종교개혁」, Peter Marshall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은 마녀에 대한 박해와 화형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격려하였다. 왜냐하면 어느 편에서도 상상된 악마를 박해하는 데 있어서 상대방을 능가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 >-August Franzen & Remigius Bäumer 씀 최석우 옮김, "세계 교회사" 368쪽 1484년 [[도미니코회]] [[수도자]] 하인리히 크라머, 야코프 슈프렝거가 [[인노첸시오 8세]]로부터 마녀재판의 권한에 해당하는 권력을 수여받았다. 그런데 2년 후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이라는 책을 출간하여 마녀사냥에 대한 여러 지침(?)을 전파했는데 이 책은 곧 교황청에 의해 출판 금지를 받았고 저자 크라머는 교황에게서 단죄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녀의 망치]]는 1517년 [[종교개혁]] 이전까지 20쇄 이상이 인쇄되어 상당히 광범위하게 퍼지게 된다. 1532년 [[신성로마제국]]에서는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영향으로 [[카를 5세]]의 카롤리나 법전이 공포되어 실질적인 위해를 가한 것으로 인정될 때만 기소되며 의심만으로는 처벌하지 못하게 규정했지만 역시나 이 시기 종교적 갈등 때문에 별로 준수되지 못했다. 오히려 이 시기부터 종교갈등이 성행하여 마녀재판이 성행하게 된다. 16세기부터 마녀사냥은 기존의 방식과 달리 종교재판의 형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녀사냥은 가톨릭권에서는 남독일, 개신교권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1590년부터 1680년까지 약 4,400명이 연루된 걸로 추정. 비슷한 시기 [[잉글랜드]]에서 200년간 교수형으로 처형한 일반범죄자가 1천명에 불과한것에 비하면 꽤나 많은 숫자이다.] 가장 심했다. 또한 프랑슈콩테에서도 마녀사냥이 많이 이루어졌다. 독일의 개신교 지역에서도 남독일보다는 덜 하지만 마녀사냥 풍속이 남아있었고[* 마르틴 루터가 살던 비텐부르크에도 1540년 마녀사냥이 처음 있었다고 한다.] 청교도들이 이주한 [[북아메리카]]에서도 한때 마녀사냥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개신교 중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정착한 잉글랜드와 루터주의가 자리잡은 북독일에서는 상대적으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고,[* 출처: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 가톨릭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와 이탈리아 반도에서 마녀사냥이 성행하지 않았다.[* 출처: Peter Marshall, 「종교개혁」] 마녀사냥과는 별개로 가톨릭권의 스페인, 개신교권의 잉글랜드에서는 상대종파 신자에 대한 박해가 있었고, 네덜란드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모두가 상대방을 박해했다. 특히나 합스부르크가의 펠리페 2세는 종교재판으로도 악명이 높았지만 마녀나 마법에도 관심이 많아 '''마법은 인류의 골치거리'''라는 선언으로 저지대에서의 마녀사냥이 대폭 강화되었다. 그런데 정작 스페인 본토는 마녀재판이 적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