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녀사냥 (문단 편집) ==== 번외: 스페인 마녀사냥에 대한 진실 ==== 현대에는 당대 [[에스파냐]]에서 행해진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이 굉장히 유명한데, 얼마나 유명한지 '스페인 이단심문관'이나 '스페인 종교재판소'라는 단어가 하나의 고유어로 쓰일 정도로 마녀사냥과 이단심판의 대표적인 본고장으로 알려져있다. 심지어 스페인에서 행해진 마녀사냥의 피해자가 30만명이라거나, 심지어 200만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일부 사학자들은 스페인이 [[스페인 제국]] 시절 누렸던 황금기가 끝나고 끝없는 쇠퇴와 내리막길을 걸은 원인이 바로 스페인의 가혹한 종교재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장 한국에 정발되어있는 [[스페인 내전]] 서적인 앤터니 비버의 스페인 내전을 읽어보면 에스파냐의 종교재판과 이단심판으로 인해 교회의 권위가 꺾이지 않았고, 교회가 극단적인 청빈사상과 반자본주의 논리를 가르치는 바람에 스페인이 17세기 이후로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 사학자들은 이 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스페인의 경우는 정말로 억울한 경우인데, 스페인은 마녀사냥의 숫자 자체도 알려진 것보다 적었을 뿐더러, 이단심문 역시도 알려진 것보다는 덜 광폭했다. Helen Rawlings의 통계(저서인 The Spanish Inquisition에서 인용)에 의하면 사형이 집행된 희생자 숫자는 최대한도로 올려잡아서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약 2000명이며 이마저도 1540년대부터는 콘베르소에 대한 의심이 줄어들고, 재판에 체계가 잡혀가면서 1700년까지 에스파냐 이단심문의 모든 관할권을 합쳐 총 826명만이 처형되었다. 롤링스의 통계를 토대로 최대한도로 잡는다면 가장 참혹했던 1480년부터 1530년까지 연간 40명이 처형된 것인데, 이는 끔찍한 희생이기는 하지만 유럽의 타국가들보다 스페인이 더 잔혹했다고 말하기엔 힘든 숫자이다. 또한 유대인 역사학자 Henry Kamen의 저서 The Spanish Inquisition에 의하면 스페인 이단심문에서는 100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을 경우 한두명만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는 인형을 처형했는데, 이것이 사형 집행자 숫자가 터무니없이 오해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특히 스페인 이단심문에서 40만이 처형되었다는 황당한 정보도 많이 돌아다니므로 주의. John Vidmar의 저서 「십자군과 이단심문 Q&A 101」에 의하면 17세기 스페인 톨레도 법정의 경우 151건의 마녀재판을 다루었는데, 이는 연간 약 1.5건이다. 또한 이들 전체가 처형된 것도 아니다.(이 문서에 자주 인용된 Peter Marshall에 의하면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유럽 전체에서 약 10만명이 고발당해 4만명이 사망) [[https://www.sedaily.com/NewsView/1Z5AUMZIGQ|국내의 이 기사]]에는 피해자가 30만명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는 출처 불명의 뇌피셜을 싸질러놓고는 심지어 200만명설도 설득력이 있는 가설이 것처럼 기사를 써놨는데, 당대 스페인 주교들에게 이 기사를 보여주면 아마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기실, 윗 문단에 써있는대로 마녀사냥이 가장 극심했던건 스페인이 아니라 독일이다. 아니 애초에, 스페인이 17세기부터 끝없는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명제 자체를 현대 역사학계는 부정한다. 흔히 엘리자베스 1세 시절의 [[칼레 해전]]으로 인해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몰락하면서 재해권을 영국에게 빼앗겼고 신대륙에서 온 금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박살나는 등의 이유로 인해 스페인이 지속적인 몰락의 길을 걸었다고들 설명하는데, [[칼레 해전]] 문서에도 보듯 이후에 스페인 해군의 전력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기는 한데 이 전투가 스페인 무적함대의 괴멸이라느니, 영국 재해권 차지의 시발점이라느니, 심지어 스페인 몰락의 시작으로 잡는 이론은 이제는 아예 없다. 스페인 함대가 칼레 해전에서 잃은 함대는 불과 세 척뿐이었으며, 81척의 함대는 전투가 아니라 귀환 중에 가혹한 바다환경으로 인해 침몰한 것이다. 거기다 그 함대가 스페인의 전 함대도 아니고 지중해 함대가 멀쩡히 남아있었으며, 잉글랜드는 이후로도 스페인과 해전에서 정면충돌할 경우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부연설명하자면, 애초에 스페인 해군은 칼레에서 영국과 정면으로 맞붙지조차 않았다. 국내에는 스페인 배가 큰 대신 느린 반면 영국 배는 작은 대신 빠르고 대포 사정거리도 길어서 유리했다고 하는데, 글쎄...스페인 배와 영국 배가 정면으로 싸우면 영국이 탈탈 털렸을 거라는게 통설이다. ] 그리고 인플레이션의 경우 교과서에도 써져있을 정도로 널리 퍼진 이론이지만 2023년 기준으로는 부정되고 있다. 최근 연구들은 하나같이 신대륙에서 온 금이 인플레이션을 유발하기는 했으나 실제 경제에 미친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고 보고 있으며, 하물며 그게 스페인의 경제를 박살낼 정도는 당연히 아니었다. 물론 스페인이 그렇다고 꽃길만 걸은건 당연히 아니고 중간중간 허덕댔던 시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불황-호황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평범한 경제패턴을 따라갔다. 대서양 재해권은 여전히 스페인이 쥐고 있었고, 식민지는 여전히 부를 가져다주었다. 식민지 의존도가 높았다는 주장은 사실이기는 한데, 이 시점까지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몰락한 것은 바로 다름아닌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서이다. 나폴레옹 전쟁 결과로 스페인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고, 국내의 갈등도 촉발되었으며, 전쟁 중에 멕시코를 비롯해 식민지가 연달아 독립하는 걸 막지 못하면서 경제가 완전히 붕괴되었다. 한편 자유주의자들이 정계에 출현하면서 보수 세력과 갈등을 빚었으며, 산업화는 지지부진한 반면 지주들과 귀족들의 특권은 여전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1830년대를 휩쓴 카를로스파 전쟁은 스페인을 유럽 내 후진국으로 뒤떨어지게 만들었다.[* 카를로스파에 직접적으로 가담한 지역은 그리 많지 않으나,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심정적 동조자들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둘로 쪼개졌고, 거기에 어렵게 즉위시킨 [[이사벨 1세]]의 삽질이 나라를 망쳤다. 이사벨 여왕이 삽질을 해대면서 그녀를 지지한 자유주의자들의 입지가 심각하게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 이런식으로 비단 스페인 뿐 아니라 이탈리아와 같이 가톨릭 국가들이 마녀사냥을 많이 했고 개신교는 깨끗했다는 식의 시관은 명백하게도 30년 전쟁 및 이후의 개신교 측의 프로파간다이며, 매우 충실한 반가톨릭주의자들이었던 초기 미국인들에게도 전래되었다. 그것을 근대의 계몽주의자들이 약간 비틀어 중세를 까기 위해 마녀사냥이 중세에 이루어졌다고 올려친 뒤 가톨릭=마녀사냥 프레임을 이용해 중세=가톨릭=마녀사냥이라는 등식을 완성시킨 것이고, 유럽 가톨릭의 대표주자로써 스페인이 지목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