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녀사냥 (문단 편집) ==== 마녀사냥의 또 다른 실체 ==== 단순히 종교적 광기로 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이걸 종교적 광기로만 볼 수 없다고 한다. 다양한 이해관계에 종교가 대표되어 벌어진 사건인데 종교만 기억에 남는 십자군 전쟁과 비슷한 사건이다. 또한 현재의 생각과 같이 굉장히 무식하고 줏대 없이 시행했을 것 같지만 이러한 예상과 달리 당시 지식인인 종교인과 정치가, 행정가, 판사들이 뭉쳐서 굉장히 체계적이게 일을 처리했다. 원인으로 지목할 것이 많아 무엇이 정확한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굉장히 애매하다.[* 전통적으로는 교황권이 약해지면서 발악한 거라는 견해가 많았으나, 교황권이 종교개혁 시기를 기점으로 과연 약해졌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러 반론의 등장(특히 트리엔트 공의회), 개신교 지역에서도 가톨릭 못지 않게 마녀 사냥이 많았다는 점 등으로 인해,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교파화'라는 현상에서 주로 일컬어진다. 자세한 건 후술.] 또한 지역이 방대하다 보니 원인들 중에 지역에 따라 적용되는 것과 안되는 것도 나뉜다. 먼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대기근과 흑사병 문제이다. 당시 16세기에서 17세기 [[소빙기]][* 이 시기 [[일본]]에서는 [[텐메이 대기근]]이, [[조선]]에는 [[경신대기근]] 등이 일어났다.]였다는 점(17세기 위기론), 그로 인한 [[대기근]], 대기근으로 인한 경제와 식량 사정악화 , 그 전부터 맹위를 떨치던 [[흑사병]]과 가축들의 전염병,[* 대부분의 마녀들이 기소당할 당시에 질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기소를 당했다.] 개신교 등장으로 인한 다양한 종파등장과 사회적 불안, 개신교 등장과 30년 전쟁 이후 약해지기 시작한 교황의 세속 권력, 지방권력의 약화 시작[* 당시에는 중앙권력보다 각 장원의 지방 권력이 더욱 강했다. 영주는 그 땅에 오랫동안 군림하는 왕 수준이었기 때문에 중앙의 왕이라 해도 함부로 어떻게 하지는 못했다. 다만 흑사병 이후 인구가 줄어들어 농노들이 강해졌고 이들 중에 자영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농노들 중에 일부가 반기를 들기도 했다.], [[30년 전쟁]](1618∼1648)과 가톨릭 국가들의 패배와 가톨릭으로부터 해방된 개신교 국가들, 각종 반란이 당시에 일어났고 '''사람들은 연속된 불행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흔히 학계에서 '교파화( confessionalizaion)'라고 부르는 용어를 유의해야 한다.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자체적 쇄신운동은 최종적으로는 사회의 세속화라는(당사자들마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불러왔으나, 당사자들이 개혁하고자 한 것은 개개인의 신앙 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신앙이었다. 이 시기의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은 대체로 세속권력에 호의적이였으며[* 다만 사회적으로 탄압받는 소수종파들 사이에서는 '폭군살해론', 다시 말해서 [[맹자|폭군을 살해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인식이 퍼져갔다. 지역적으로는 잉글랜드 치하 아일랜드의 가톨릭 신자들과,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자들을 예시로 들 수 있다.] 군주들은 자신의 왕국과 교회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았고, 군주이든 교황이든 점점 더 '중앙집권화된' 교회조직을 원했다. 가톨릭은 근대적 의미의 신학교를 통해 성직자 양성시스템을 혁신했고, 이들은 마치 근대국가의 '사관학교'처럼 국가를 중앙집권화시켰다.[* 네덜란드가 독립해버린 이유 중 하나는, [[펠리페 2세]]가 이 지역에 근대적 신학교를 짓고 성직자 양성 시스템을 쇄신하려고 하면서, 네덜란드의 도시들이 이를 중앙의 과도한 간섭이라고 받아들인 탓이다. 자세한 것은 [[네덜란드/역사]] 문서로. 교황의 경우는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속권은 약해졌으나, 교권은 상승했다. 다시 말해, 종교적 분야에서 전세계의 사제들에게 행할 수 있는 통제력이 커졌다.] 개신교에서도 '애국자'와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둘이 아니라 하나였으며, 칼뱅주의자들이 극찬하던 도시국가인 [[제네바]] 역시도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았다. '''종교개혁 시대의 유럽인들에게 국가란 결코 각자의 생각에 따라 따로따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의 대상은 사회 전체였다. '''다양한 종파의 등장으로 인한 기본질서의 혼란, 계속된 사회 혼란(기근, 흑사병, 전쟁, 흑사병으로 인한 장원의 약화) 등등 사회는 각 부분에서 혼란이었고 그 혼란을 직격으로 맞는 것은 대중들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버티려고 노력했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었고 결과적으로 대중들의 분노는 한계를 넘어가기 시작했다. 각 사회의 수장들 역시 이 사회의 혼동을 묵인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유럽인들은 혼란스러운 사회를 쇄신하기 위하여 불순분자들을 걸러낼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보에 오른 것은 오랜 종교적 전통상 '악마'였지만(그 실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겠지만) 사람 눈에 보이는 존재도 아니었으니 이에 대한 처벌을 할 수가 없었다. 즉 군중들이 '사회 쇄신'의 거름으로 삼고 박해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친숙하고, 물리적으로 폭행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찾아낸 것이 더 실체가 명확한 마법사와 마녀였다. 마법사와 마녀는 악마의 하수인으로 인정받았고, 결국 '''마녀사냥으로 마녀와 마법사를 죽여 혼란의 원인을 차단했으니 우린 이제 안전하다'''는 안정감과 사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사회를 혼란스럽게 한 다양한 원인들이 있었고 그 원인들이 통합적으로 작용했다. 그 해결과정에서 각 계층은 순수하지 못했고 자신들만의 손익계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고통에 대한 원인과 호소의 대상이 필요하였고, 각 종파는 혼란스러운 사회 현상 속에서 쇄신된 신앙을 바탕으로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고, 국가는 이 신앙들을 바탕으로 지방권력을 누르고 중앙권력을 강화하려 했으며, 왕의 입지를 강화해보고자 하였고, 사회의 불안정으로 인해 혼란이 지속되고, 결정적으로 교회와 국가는 이분법적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 가장 유사한 사례를 꼽자면 바로 냉전시대의 환경일 것이다. 실제로 냉전시대이든 종교개혁 시대이든,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경건한', 혹은 '애국적인' 모두를 위한 행동을 한다고 진심으로 믿었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마녀사냥의 혼란스러움과 상황통제의 어려움이 오히려 병폐로 지적되기 시작했고, 재판 과정도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니냐는 이의제기가 있었다. 마녀재판이 너무 심해지면서 도리어 지역 공동체가 극도로 분열, 나중에는 마녀재판 그 자체가 악마의 농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가 되기도 했다. [[미국]] [[세일럼 마녀 재판]]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정도쯤 되면 이단심판관들에게 마을 사람들이 공공연히 적대감을 보일 정도였다. 그리하여 각 나라들은 사법개혁을 통해 마녀사냥을 금지하기 시작했고 끝내 마녀사냥은 자취를 서서히 감추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