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륭 (문단 편집) === 서방의 위기 === >「오회(吳會)가 평정되지 않아 용맹스러운 선비를 얻어 무공을 이루어야 하는데, 옛 천거의 법은 수재가 다 없어져 넉넉하지 못하다. 이 넓은 주와 군에는 장대하고, 날래고, 빼어나고, 기이한 재주와 힘이 있는 걸출한 자가 있을 것이니, 모두 그 이름을 듣고 정성으로 발탁하여 기용하라. 진실로 그런 사람이 있다면 뽑아서 기용하는 수와 기한을 제한하지 않는다.」 >-『진서』 「마륭열전」에 기재된 조서. 태시 연간[* 서기 265 ~ 274년이다.]에 [[사마염]]이 오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인재들을 모았는데, 마륭은 연주에서의 추천으로 사마독이 되었다. 270년에 진주자사 [[호열]], 271년에 양주자사 [[견홍]] 등이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에게 전사한 상황에서 서진에서는 크게 걱정했다. 277년에 [[사마준]]이 독발수기능을 격파함으로써 20만여 명의 호족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등 독발수기능은 약소세력으로 전락했다. 모두가 방심하는 와중 278년에 [[양흔]]이 '''독발수기능과 한무리였던 [[강족]]과의 화친을 끊었다.''' 이 사실을 안 마륭은 말했다. >"양주자사 양흔이 강족과의 화평을 잃었기 때문에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 >-『[[자치통감]]』 80권[* 구체적인 발언 내용을 담은 『자치통감』과 달리 「마륭열전」에서는 단순히 죽을 것이라고 얘기했다고 서술한다. 묘하게 자치통감에서 더 자세한 것을 보면 사마광이 참고한 또 다른 모종의 자료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륭의 예측대로 양흔은 무위에서 강족 [[약라발능]]과 교전하나 크게 패하여 목숨마저 잃었다. 279년 봄, 약소세력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독발수기능에게 양주가 함락되면서 서쪽 지방은 [[서진]]정권과 완전히 연락이 두절되었다. [[사마염]]은 서방상실에 큰 근심에 빠졌고, 이런 상황을 타파하기 위한 신료들에게 계책을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마륭은 이에 나아가 말했다. > >"폐하께서 신에게 이를 맡기신다면 신이 능히 이를 평정하겠나이다." > >황제는 말했다. > >"반드시 적을 멸할 능력만 있다면 어찌 맡기지 않겠는가. 생각건대 경의 방략(方略)은 어떠한지 듣고 싶다." > >마륭은 말했다. > >"폐하께서 신에게 맡기고자 하신다면 신의 말을 들은 뒤에 맡겨 주시옵소서." > >황제는 말했다. > >"무엇인가?" > >마륭은 말했다. > >'''"삼천의 용사를 뽑아 서쪽으로 북을 치며 나아간다면, 폐하께서 위덕으로 여쭐 때 추한 오랑캐들을 멸하기에 충분합니다!"''' >-『진서』 「마륭열전」 아무도 답하지 못하자 마륭은 호기롭게 '''3천 명'''의 용사만 있다면 독발수기능의 무리를 평정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놀랍게도 [[사마염]]은 이를 허락하면서 토로호군 겸 무위태수로 삼았다. 공경[* 삼공과 구경을 뜻하는 말인데 즉 [[서진]]의 [[높으신 분들]]이다.]들이 사마염에게 아뢰었다. >"이미 육군(六軍)의 무리와 주·군의 병사가 많은데, 이들을 쓰고 상을 넓게 베풀지 못한다면 법이 어지러워질 것입니다. 어린 장수 마륭은 망설을 하는 것이니 이를 따를 수 없습니다." 즉, 이들은 이미 군대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의용병을 고용해 사사롭게 포상을 주면 전후에 기존의 군체제에 편입하기 어렵고 골칫거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으니 아예 안 쓰는게 상책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마륭의 호기로운 제안에 대해서도 "어리다"는 이유로 망설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데, 마냥 [[높으신 분들]]의 어리석은 지적질로 보일 수 있으나 사실 이전까지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한 [[듣보잡]]이 겨우 삼천 명을 데리고 수만 명의 적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말을 믿는 게 오히려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사마염은 공경의 간언을 듣지 않고 끝까지 마륭을 기용했다. 이는 파격적인 모습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독발수기능이 참살당한 후에 마륭의 병사들에 대한 포상을 줄이는 쪽으로 조정이 방향을 바꾸고 사마염이 이에 대한 반대를 안했다는 점에서 공경의 경고한 문제점을 포상을 줄이는 방법으로 풀려던 게 아니냐고 볼 여지가 존재한다. 이 해석이 옳다면 사마염의 행동은 상당히 찌질해 보인다(...).] >마륭은 표지를 세워놓고 4균(筠)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9석(石)의 [[쇠뇌|노]]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렀다. 아침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총 3,500명이 모집되었는데 마륭은 이를 보고 말했다. >'''"충분하다."''' >『진서』 「마륭열전」 후일 조선시대 등에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상당한 정예병력으로 평가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임하팔기』에서는 손자병법의 구절 중 하나인 "병력을 동원하면서 정예병을 선발하지 않는 것을 배군(北軍)이라 한다."의 반례로 [[곽거병]]의 정예병과 마륭의 시험을 꼽았다. [[양요]]의 논박문에 의하면 벼슬과 작위를 빌미로 이들을 모집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투력이 굉장히 높았던 듯. 마륭은 병사들에게 무고에 가서 원하는 병장기를 선택하도록 했지만 무고령[* 대충 무기고의 '''대빵'''을 뜻한다]이 마륭과 분쟁을 일으키고, 어사중승이 마륭을 탄핵하자 마륭은 [[사마염]]에게 아룄다. >"신은 목숨을 걸고 싸움터에 나가는데 무고령이 '''위나라''' 때의 썩어빠진 병장기를 주려고 하니 이는 폐하께서 신에게 일을 시키시려는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진서』 「마륭열전」 그러자 [[사마염]]은 마륭에게 필요한 물품과 3년치 군자금을 하사하고 마침내 그의 군대를 서방으로 파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