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륭 (문단 편집) === 위엄과 신의로 농서일대를 다스리다 === 태강 연간[* 서기 280 ~ 289년이다.]에 서평이 황량하기에 마륭을 평로호군에 서평태수로 삼아서 파견했다. 성해(成奚)라는 오랑캐가 매번 소란을 피우자 지역의 근심이 되었는데 마륭은 이런 성해를 격파하고자 했다. 성해는 험한 지형에 의지해서 수세에 일관하자 마륭은 이에 대응해 농장기를 들고와 농사를 짓는 척을 했다. 처음에 엄산했던 군기를 자랑했던 성해는 적의가 없어보이는 침공군을 경시해 시간이 지날 수록 게을러졌다. 마침내 적이 경계를 풀자 마륭은 성해를 습격해 반란을 평정했다. 그후 서평에서는 감히 도적이 나타나질 않았다고 한다. >관직에 십여 년을 머무르자 위엄과 신의가 농우(隴右)에 우레같이 울렸다. -『진서』 「마륭열전」 290년에 마륭은 봉고현후에 봉해지고 동강교위가 되었다. 10여 년 동안 마륭은 농서일대를 위엄과 신의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는 이미 10년 동안 독발수기능이 깽판쳤음에도 통령체제를 어느 정도 회복했음을 시사하는데 마륭이 군사적 재능 뿐만이 아니라 이민족을 다루는 행정능력도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대에도 이런 명장을 시기하는 사람이 존재했으니 그는 악양태수 빙익 사람 엄서(嚴舒)였다. 엄서는 마륭을 대신하고 싶어서 '마륭이 늙어서 병장기를 들 수 없다'는 소문을 내자, [[서진]] 정권은 마륭을 불러들이고 엄서가 그를 대신해서 진수했다. 그러나 호락호락하지 않은 이민족이 준동하여 저족과 강족이 서로 연합하고 모여들자 백성들이 매우 두려워했다. 조정은 관농 일대가 다시 시끄러워질게 두려워 엄서를 면직해 마륭을 다시 복직시켰다. 마륭은 끝까지 벼슬을 지내다가 죽었다. 죽은 년도가 알려지지 않았으나 296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296년에 옹주와 진주에서 제만년의 난이 터져서 강족과 저족도 함께 준동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마륭열전」에서 이를 시사하는 기사가 전혀 없다. --있었다면 다 후드려패고 다녔겠지-- --애시당초 쟤들이 들고 일어난 이유가 마륭이 없어서 기회라고 생각한걸지도-- 마륭의 아들 마함(馬咸)이 대를 이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날래고 용력이 있었다고 한다. [[팔왕의 난]] 당시 성도왕 [[사마영]]이 [[사마예]]를 칠 때 마함을 응양장군으로 삼아서 하교를 방어하도록 했지만 [[사마예]]의 장군 왕호한테 패하여 죽었다. 다른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