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륭 (문단 편집) == [[제갈량]]의 [[팔진도]] 응용 == [[http://webbuild.knu.ac.kr/~china/CHR/chr2013/chr83pdf/chr83-01HongEP.pdf|강원대 홍을표 박사가 쓴 '서진 마륭의 서정으로 본 팔진도' 논문]][* 몇가지 사소한 오류가 있는데 논문 첫부분에 위나라 멸망년도를 265년이 아니라 263년으로 오타를 냈고, [[학경]] 속후한서를 인용해 위씨춘추에 월시(鉞矢,도끼 모양의 촉을 가진 화살)로 만들었다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썼는데 [[학경]] 속후한서 원문은 '以鐵為矢'로 철시(鐵矢)이다. '鐵'과 '鉞' 두 글자가 비슷해 잘못 본 것으로 보인다.] 연주 출신으로 제갈량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 데다가 활동 시기가 전혀 달라서 제대로 만나본 적도 없는 인물이지만, 묘하게 연관되는 부분이 많은 인물이다. 가장 큰 예로 팔진도가 있다. 진서 「마륭열전」에서 대놓고 팔진도에 의거해 편상거를 만들었다고 서술된다. 이는 아무래도 제갈량이 사마의의 대적자였던만큼 마륭이 그의 전술과 병법을 많이 연구한 탓이 크다고 할 것이다. >[[두헌]]은 일찍이 팔진을 통솔해 흉노를 공격했고, 진의 마륭도 팔진을 활용해 양주를 다시 찾았다. -『제갈량 평전』 >승상 제갈량이 부릉의 힘센 병졸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 >---- >[[화양국지]] 유후주지 >그대의 팔진(八陣)을 미루어보면 손자, 오자 때도 없던 것이고, 목우(木牛)의 기이함은 쉽게 본뜰 수 없고, 신노(神弩)의 공은 또한 미묘하구나! 천정(千井)을 가지런히 쌓으니 또한 얼마나 비요(祕要)한가! 옛날 전, 요(주문왕을 보좌한 태전泰顚과 굉요閎夭)가 명성이 있어 뒤쫓을 자 없다 하나 그 누가 그대의 뛰어나고 기묘한 주획(籌畫)만 하겠는가. >---- >제갈량전 추석 촉기, [[유홍(서진)|유홍]]이 이흥을 시켜 쓰게 한 글.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이나 그에 쓰였던 원융(元戎)이 이전에 없던 독창적인 것이며 제갈량이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당대의 인식을 반영한다. >마륭은 표지를 세워놓고 4균(鈞)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36균(9석(石)이다)의 [[쇠뇌|노]]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렀다. 아침 해가 중천에 이르렀을 때 총 3,500명이 모집되었는데 마륭은 이를 보고 말했다.[* 36균은 약 238kg이고 4균은 약 26kg이다.] >'''"충분하다."''' >---- >[[진서]] 마륭열전 >마륭이 서쪽으로 온수(溫水)를 건너자 오랑캐 [[독발수기능|수기능]] 등이 만(자치통감에서는 수만)을 헤아리는 무리로 일부는 험지를 타 맢을 막아서고, 일부는 복병을 두어 뒤를 끊었다. 마륭은 팔진도(八陣圖)에 의거하여 편상거(偏箱車)[* [[자치통감]]에서는 마륭의 팔진도 사용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진서를 인용하면서 그가 편상거를 만들었다는 것을 언급해 간접적으로 팔진도를 언급하였다. 편상거는 팔진도에 의거해서 만들어졌으니. 한편, 편상거는 제갈팔진도 중 치중차에 가죽을 덧씌워 공방일체로 쓴 거몽진법을 응용한 듯 싶다.]를 만들었고, 넓은 땅에서는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모범으로 삼았으며, 좁은 길에서는 법칙대로 목실(木屋)을 수레 위에 올렸다.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니 궁시가 그곳까지 미치고 쏜 화살이 보기 좋게 명중하여 활시위의 소리에 응하듯이 적이 넘어졌다, 기책을 간간이 발하니 적이 나와 대적할 뜻을 잃었다.[* 태평어람에 인용된 왕은의 진서에서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마륭을 무위태수로 삼았다. 군으로 갔는데, 악한 오랑캐 굴국수기능 등이 길을 끊고 마륭을 포위했다. 마륭은 팔진도를 만들어, 지형이 광활한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녹각거영으로 병진했고, 좁은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목실을 덮어 나란히 싸우고, 전진했다. 지모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고, 뜻밖에 허를 찔렀으므로, 좁은 도로 측면에 자석을 뿌려서, 적의 갑옷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마륭의 병사들은 소가죽 갑옷을 입어 움직일 수 있으니, 적이 귀신이 되었다. '(馬隆為武威太守。之郡,惡虜窟局樹機能等斷道圍隆。隆作八陣圖,地廣則鹿角車營并進,狹則木屋施輪,并戰并前。智謀從橫,出其不意,以磁石累夾道側,賊鎧不得過。隆兵著牛皮鎧得過,賊以為神。) 팔진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관찬 진서의 표현대로 팔진도에 의거해 팔진에서 가장 중요한 편상거 진영을 만들었다는 뜻일것이다. 태평어람 왕은진서의 다른 구절엔 '마륭은 양주를 공격했는데, 악한 오랑캐가 길을 끊었다. 마륭은 팔진도 거영(車營, 수레진영)을 만들어서 나란히 추격했다, 좁은 곳에서는 규범에 따라 목실을 덮고 나란히 전진했다, 지모는 자유자재로 거침이 없고, 뜻밖에 허를 찔렀으므로, 능히 성공했다.'(馬隆擊涼州,惡虜斷道。隆作八陣圖車營并追,狹則木屋施輪并前,智謀縱橫,出其不意,故能成功。)라고 나와 있기도 하고 말이다.] >---- >[[진서]] 마륭열전, 중국 사서들은 수많은 전쟁을 기록하고 있으나 특정한 진법으로 작전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법을 처음 만들었다는 황제(黃帝)의 탁록(涿鹿) 전쟁이나 팔진도로 명성을 날린 제갈량의 전쟁 기록에도 무슨 진법으로 싸웠다는 내용은 없다. 이러한 현상은 진법이 군사적 기밀사항이라 사관들이 인지할 수 없었던데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진서에서 마륭이 팔진도에 따라 싸웠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팔진도의 위력이 서진은 물론 (진서가 편찬된) 당대(唐代)에까지도 명성을 떨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이 기록을 통하여 서기 234년에 제갈량이 죽은 뒤 45년이 지났는데도 서진에서는 제갈량이나 그의 팔진도 전법을 연구하고 활용했다는 점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당대 팔진도는 이전의 병법에 없는 제갈량만의 독특한 병법으로 여겨졌다. 손오의 병법에도 없는게 제갈량의 팔진도라고 한 진남장군 [[유홍(서진)|유홍]]과 제갈량의 팔진도를 완벽히 습득한 [[진협]], 팔진도를 실제 사용한 마륭은 완전히 동시대 사람이다. >3만의 적은 병력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구려]]를 정벌하려면 어때한 전략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오? > >[[이정(당)|이정]]이 대답하였다. > >신은 정병(正兵)으로 공략하려고 합니다. > >태종이 말하였다. > >장군이 지난 번 돌궐을 평정할 때에는 기병(奇兵)을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어찌하여 정병을 사용하려 하오? > >이정이 대답하였다. > >옛날 [[제갈량]]이 [[남만]]을 정벌하여 그 군주인 [[맹획]]을 [[칠종칠금|일곱 번이나 사로잡았을 때]] 바로 정병을 사용한 것입니다. > >태종이 말하였다. > >진(晋)나라의 마륭이 [[양주(중국)|양주]]의 [[강족]]을 토벌할 때에도 (제갈량의) 팔진도에 의하여 편상거(偏箱車)를 활용하였는데, 지세가 광활하고 평평하면 녹각거영(鹿角車營)을 만들어 적의 진공에 대비하였고, 도로가 협착하면 수레 위에 판자 지붕을 만들어 덮고 적과 싸우면서 진군을 계속한 바 있소. 그러니 정병은 옛날의 명장들도 중요시하였던 것이기는 하오. > >이정이 말하였다. > >지난 번 신이 [[돌궐]]을 토벌할 때에 서쪽으로 몇 천리를 진격하였습니다. 그 때 만일 정병을 쓰지 말았다면 어찌 그렇게 멀리까지 원정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녹각거(鹿角車)와 편상거(偏箱車)는 전투에 매우 중요합니다. 군사들의 전투력을 절약할 수 있는가 하면, 전진하면서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으며, 또한 전진하면서 대오를 정돈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교대로 상황에 따라 시행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면 마륭은 ([[제갈량]]의) 옛 전법을 깊게 체득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이위공문대 >진나라 때는 오직 진협과 마륭이 제갈량의 옛 진법 한 두가지를 사용했을 뿐이다. 마륭은 3,000명을 모병하여 서량을 평정해 그의 공적이 널리 드러났으나, 진협에 대한 일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교표치(校標幟) 라는 군대의 한 가지 기물만 사용했을 뿐인데도 여러 차례 혼란을 수습하였다. 부대 간에 다툼이 일어나 도성의 궁궐이 포위당하는 위협을 받았으나 백비번(白飛幡)을 한 번 휘저으니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풀고 싸우지 않았다. 이와 같이 그가 휘(麾)의 신호를 가지고 효력을 본 것이 여러 차례나 되는데, 누가 옛날의 진법을 일러 후세에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며 군정(軍政)은 일상생활이나 국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원문: 陳傅良, 歴代兵制 卷三 (電庫 所收), “三國…晉之世, 惟陳勰․馬隆, 用諸葛亮古陣遺法, 畧試一二. 隆以募兵三千, 克平西凉, 厥功彌著. 勰事雖不槩見, 然,徒校標幟兵之一物耳, 更數大亂京闕圍逼, 而白飛幡一麾, 衆皆解甲不鬪, 麾號數信,收效至此, 孰謂古法之, 不可施於後世, 而軍政之果, 無益於人國也.] >---- >진협과 마륭의 일은 후대에서도 관심사가 되었다. 한 예로 송나라는 황제까지 나서서 진법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했던 시기가 있었는데,([[송사]] 195권) 이 때도 진협과 마륭의 고사는 비중있게 다루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확인해 볼 수 있다. 위 글은 진부량(陳傅良)이 쓴 역대병제(歴代兵制)에 있는 내용 중 하나이다. 그는 '옛날에 사용했던 진법은 지나간 유물이 아니라 후대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하면서 '진법과 같은 군사 분야의 제도들은 군대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상생활이나 국가의 통치수단에도 활용할 수 있다'고 했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같은 시기의 장여우(章如愚)가 편찬한 군서고색(羣書考索)[* 원문: 章如愚, 羣書考索 後集 卷四十九 (電庫 所收), "兵門…晉之世, 惟陳勰․馬隆, 得諸葛亮古陣遺法, 畧試一二. 隆以募兵三千, 平西凉, 厥功彌著. 勰事雖不概見, 然徒校幖幟兵之一物耳. 當凉關, 倉皇之中, 而白虎幡一麾, 衆皆解甲麾弓, 素信收歛, 至此, 孰謂古法, 不可施之後世, 而軍政之無益於國哉.", 내용은 진부량의 역대병제와 거의 같다.]과 왕응린(王應麟)이 쓴 옥해(玉海)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참고로 송나라 시절은 [[송사]] 예문지에 남아있는 [[제갈량집]] 14권과 제갈량행병법(諸葛亮行兵法) 5권, 무후팔진도(武侯八陣圖) 1권 등이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는 등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 현대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시기였다.[* 더불어 [[태평어람]] 등에 무후병법, 제갈량병요 등이 인용되어 있었고, 왕응린이 쓴 옥해(玉海) 중흥서목(中興書目)에는 량집(亮集) 14권에 비기(碑記)등의 12편이 2권으로 더 편성되어 들어가 있었다.] 이는 [[무경칠서]] 중 하나인 당태종[[이위공문대]]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이 책 자체는 당태종과 이정이 실제 말한것이 아닌 위서이다. 그러나 [[사고전서]] 총목제요에 따르면 비록 책은 위서이나 옛 이정과 당태종(貞觀)의 유사(遺事)를 따라 당나라 말기, 송나라 초기의 선비가 지은 책이었고 정원(鄭援)의 정관쇄언(井觀瑣言)에서는 학식과 모략이 있는자가 지었다고 일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제갈량과 마륭이 사용했던 팔진도의 녹각거와 편상거가 당나라 말기~송나라 초기 이 시대에도 전해지고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책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제갈량은 병법을 미루어 넓히고 [[팔진도]](八陳圖)를 만드니 모두 그 요체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하고 있고, 서진의 진남장군 유홍이 건위사람 이흥을 시켜 쓰기를 제갈량이 개량한 팔진도가 [[손자]], [[오기(전국시대)|오자]]의 병법에도 없는 것이라 극찬하여 제갈량이 독창적으로 팔진도를 만들었다 했으며 제갈량 이후 지금까지 팔진도는 제갈량 고유의 전술이 되기에 이른다. [[사마소]]는 촉한이 망하자 측근 장수 진협을 시켜 제갈량의 위진을 습득하게 했다. [[서진]] 사람들의 인식이 이러했으므로 마륭의 팔진도도 제갈량의 팔진도의 법식을 받아 대기병전술에 사용되었으며 제갈량의 팔진도는 [[촉한]] 시기부터 서진을 거쳐 당~송 왕조에 이르기까지 유전되고 발전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제갈량 사후 그의 전략전술을 사마씨가 연구하고 전승한 결과인 듯 싶다. 일례로 [[사마의]]가 죽은 제갈량의 진채를 둘러보고 그를 기재(奇才)라 칭찬한 것도 그렇고, [[사마소]]와 [[사마염]]이 근위대장 진협을 시켜 제갈량의 진법을 훈련시키게 했다는 기록을 감안하면 서진에서 군부 내지 국가 단위로 제갈량(또는 제갈량의 병법)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갈량은 적국의 최고 군사령관이었음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다만 이는 서진 지배층의 제갈량에 대한 존경의 시각이 가미된 것일수 있다. 촉한이 멸망하기 전에야 제갈량은 적국의 수괴였지만 촉한이 멸망하고 서진이 들어섬에 따라 제갈량이 '과거의 존경받을 만한 재상'으로 이미지가 바뀐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갈량집|제갈량의 문집]] 발행, 제갈량의 진법 강습, 진무제의 '제갈량만한 신하가 없는가' 발언, 유홍이 제갈량의 옛집에 들러 이흥을 시켜 제갈량을 찬미하는 글을 쓴 것, [[양호(삼국지)|양호]]가 제갈량을 악의에 비유하는 것 등 제갈량에 대한 시선이 바뀌었다는 증거는 충분히 있다.] 이위공문대와 진서 마륭열전에 따르면 팔진도는 편상거로 운영하고 넓은 땅에선 녹각거를 운영하며 좁은 땅에선 규범대로 수레 위에 목실(이위공문대에 따르면 판자 지붕)을 올리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고 한다. 편상거는 제갈팔진도 중 치중차에 가죽을 덧씌워 공방일체로 쓴 거몽진법을 응용한 듯 싶다. 또 마륭이 4균(鈞)의 활을 당길 수 있는 사람과 9석(石)의 [[쇠뇌|노]]를 당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하면서 시험을 치렀다는 부분이 있고 이는 제갈량이 연노를 만들어 힘센 병졸 3000명을 뽑아 연노사로 삼았다는 기록과 매우 유사한데, 이에 따르면 팔진도는 투사무기를 중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이에 마차를 대기병방책으로 앞세우고 뒤에서 노병이 적을 쏜다던가, 노병과 궁병을 잘 배치하고 보병으로 적을 끌어들여 십자포화 형식으로 사격한다던가 하는, 기본적이면서도 효과있는 기본 대형이나 상황의 전술이라는 의견이 있다. 아무튼 마륭이 사용한 편상거의 성공은 [[제갈량의 북벌]]의 실패로 인해 때론 저평가받는 팔진도의 성공적인 실례로 부각된다. 덕분에 마륭의 병법은 제갈량의 정식 후계자인 [[장완]], [[비의]]나 제갈량의 군사적 후계자로 여겨지는 [[강유]]보다도 제갈량식 군 운용의 면모를 더 강하게 드러낸다. 물론 이는 강유가 어떠한 전술을 구사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이유도 있지만 말이다. 마륭과 제갈량의 유사성은 마륭의 성해 토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륭은 성해를 토벌하면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 해서 적의 의중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활용한데다가 이는 수세에 일관하는 적을 상대했다는 점에서도 제갈량의 5차 북벌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제갈량의 목적은 둔전을 통해 장기전에 돌입해 수세에 일관하는 사마의를 전장에 이끌어내는 것에 있었다면, 마륭은 수세에 일관하는 성해의 병사들을 방심케 해서 습격이 용이하도록 했다는 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