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륭 (문단 편집) == 조선시대의 인식 및 평가 == > 세종 99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2월 14일(경자) 3번째기사 >'''함길도 도절제사 김효성이 건의한 수레 싸움 법을 받아들이다''' >‘우리 나라는 산천이 높고 험하며, 도로가 좁고 막히었는데 어떻게 능히 수레 싸움의 법을 쓰겠느냐.’ 하시오나, 이는 신의 아뢰온 근본 뜻이 아니옵니다. 신이 새 고을에 두 번을 가 보았사온 바, 그 땅이 도적의 소굴에 가깝고 구원병의 오기에는 멀므로, 새 고을 성밖의 평탄한 곳에서 수레 싸움의 법을 써서 새로 이사 온 백성들을 안심하게 하고, 점차로 남도에서 방어하러 오는 군사를 줄이고자 할 뿐이오며, 높고 험한 곳에 멀리 몰고 가려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태공병법(太公兵法)》에 이르기를, ‘무릇 수레의 죽을 땅이 열 곳이 있고 이길 땅이 여덟 곳이 있는데, 장수가 해로운 10군데와 이기는 8군데에 밝으면, 적군이 비록 천 대의 수레와 만 명의 기병으로 포위할지라도 앞으로 몰고 옆으로 달려 반드시 온전하게 이긴다.’ 하였습니다. 그 해로운 10군데 중에 산천의 높고 험함을 역력히 고증할 수 있사오니,진(晉)나라 마융(馬隆)이 양주(涼州)를 토벌할 때 편상거(偏箱車)를 만들어 이리저리 다니며 싸우기를 천리나 하면서도 드디어 적을 이겼사오니, 그 천리 안에 어찌 밭두둑과 울퉁불퉁한 곳이 없었겠습니까. ‘5진(鎭)의 성밑에 비록 1마장이나 2마장의 평탄한 땅이 있다 하나, 그 사이에 어찌 언덕, 골짜기, 밭두둑, 울퉁불퉁한 것이 없으랴.’ 하시오나, 신은 가만히 생각하기를, 5진(鎭)에 사는 백성들이 항상 수레를 사용하옵는데, 이제 조그만 싸움 수레만이 오직 그런 곳에 다니지 못하오리까. ‘이제 야인의 싸움하는 것이 구름같이 모였다가 새같이 흩어진다.’ 하시오나, 신은 가만히 생각기를, 야인이 비록 말에 익숙하여 빨리 싸우는 데에 유리하다 하지마는, 어찌 능히 날아갈 수야 있겠습니까. >숙종 2권,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1월 24일(계미) 2번째기사 >'''비국을 인견하여 북한 산성의 수축과 삼남에 순무 파견하는 일을 논하다''' >“부서(扶胥)는 큰 수레이나, 무강(武剛)은 외바퀴이므로 한 사람이 운전할 수 있습니다. 위청(衛靑)은 사차(四車)로 자위(自衛)하였고, 마융(馬隆)은 수레로 식량을 싣고 요새(要塞) 밖 3천 리의 평량주(平凉州)에 나갔는데, 그 만듦새는 길이 좁으면 좁히고 평지에서는 펴니, 그 제도가 갖추어 있어 참으로 행군(行軍)하고, 적을 막는 미기(美器)이나, 신이 한 수레를 만들어 보니, 여드레 걸려서야 끝나고 드는 물력(物力)이 자못 많았으며, 또 여느 때에는 쓸 곳이 없는데 간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광해 177권, 14년(1622 임술 / 명 천계(天啓) 2년) 5월 1일(병신) 5번째기사 >'''비변사가 감군이 요구한 병마, 군량, 배에 대해 어려운 사정 밝힐 것을 아뢰다''' >우리 나라의 강변 방어는 바로 편두관(偏頭關)에 비길 만하기는 하나 병력은 중국의 한 진(鎭)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수(河水) 굽이에 있는 편두관은 황하가 띠처럼 두르고 있고 옆에는 18곳의 요해처가 있어도 노마(虜馬)가 출몰하면 방어하기 어렵다고 염려하는데 더구나 우리 나라는 북으로는 경흥(慶興)으로부터 서로는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이미 황하와 같이 막아주는 강도 없고 또 험한 요해처도 없는데다가 반이(叛夷)의 강함은 서노(西奴)보다도 심하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천 리나 되는 방수 지역을 여름이나 겨울이나 할 것 없이 매양 근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강변을 지키는데, 형세는 나누어지고 병력은 적어서 늘 근심하며 스스로 보존하고 있다. 평년(平年) 교체할 즈음에 오고 가는 숫자를 합해서 계산해 보면 천경(踐更)과 같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경우가 있으니, 그렇다면 겨우 1만 명이 되는 숫자 중에 정용(精勇)한 자는 실로 얼마 되지 않는다. 평안도 일대의 수자리 서는 병사의 경우는 그래도 상황에 따라 조발해 모을 수 있지만 북도(北道)의 병사는 조발해 오기가 쉽지 않다. 우리 나라의 경계에 여연군(閭延郡) 등 4군(郡)이 있었는데 백 년 전에 잃어 버려 오랑캐 땅이 되었으니 마치 중국 대령(大寧)의 경계에 있는 삼위(三衛)·선대(宣大) 지역이 요광(遼廣) 지역과 중간이 막혀 서로 소통하기가 곤란한 것과 같은데, 이는 우리 나라의 서북쪽이 양쪽에서 서로 구원해 주는 형세를 잃은 것이다. 군대에는 본래 허장 성세하는 경우가 있으니, 종이에다 쓰는 것은 비록 10만이라 하더라도 무엇이 어렵겠는가. 그러나 위로 성천자(聖天子)에 고하고 아래로 대노야(大老爺)에게 고하는데 어떻게 거짓으로 부풀린 수를 덮어 놓고 올릴 수 있겠는가. 도 군문(陶軍門)이 3만 명의 군사를 보내 도와준다는 설을 갖추어 보고했는데 이러한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전에 마융(馬隆)이 수기능(樹機能)을 사로잡을 때에는 군사 5천 명을 쓰는 데 불과했고,이정(李靖)이 힐리장(頡利帳)을 칠 때에는 단지 날랜 기병 3천 명만을 데리고 갔으니, 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에는 반드시 병력의 많고 적음에 구애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사세가 크게 달라지자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는 말은 하늘에 해가 있는데 어떻게 이럴 리가 있겠는가. 스스로 충분(忠憤)을 가다듬을 뿐이다. >정조 51권, 23년(1799 기미 / 청 가경(嘉慶) 4년) 4월 10일(무술) 3번째기사 >'''수원 주위의 4, 5개 군·현을 외영에 이관한 후 생긴 폐단에 대해 서유린에게 유시하다''' >옛날에 군사를 쓸 적에 모집하는 초기에는 정밀하게 선발하였으니 마륭(馬隆)이 푯말을 세우고 선발 시험을 치룬 것이 바로 이 경우이고, 이미 모집한 뒤에는 규율이 있었으니 마수(馬燧)가 수자리 사는 병사들을 잘 훈련시킨 것이 바로 이 경우이다. >마륭(馬隆)이 서량(西凉)을 토벌할 때에, 산길이 험하고 좁다하여 편상거(扁箱車)를 제작했는데, 나무로 만든 집을 수레 위에다 설치하였던 것이다. 편상거의 제도는 자세히 알 수 없고, 산길이 험하고 좁으면 말도 통행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수레를 운행할 수 있겠는가? -[[홍대용]]의 『담헌집』 >다만 위청(衛靑)의 무강거(武剛車)와 마융(馬隆)의 녹각거(鹿角車)는 그 효과가 이미 입증되었으니, 명(明)나라 이현(李賢)과 여자준(余子俊)이 ‘꼴 먹일 필요가 없는 말을 부리며, 발 달린 성을 움직이는 것 같다.’라고 한 말은 참으로 지론입니다. -이현일의 『갈암집』 >옛날 승거(乘車) 제도는 지금 비록 갑자기 회복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병서(兵書)에서 말하고 있는 무충(武衝)과 부서(扶胥), 또는 진인(晉人)들이 말한, 마융(馬隆)이 만든 편상거(偏箱車) 같은 것들은 지금도 쓸 수가 있고 그것을 만드는 법도 알기 어려운 게 아닌데다, 그것이면 돌진해오는 적군의 말을 막을 수도 있고 화포로 적진을 먼저 쳐들어가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윤휴]]의 『백호전서』 >“대(隊)는 10인이 1대인데 이는 10만 명을 말한 것입니다. 무강거는 《한서(漢書)》에서 이른바, ‘위청(衛靑)이 무강거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고 한 것이고, 편(偏)은 수레 열다섯 대입니다. 무강거는 위에 방패를 설치하고 아래에 한 개의 바퀴가 있는데, 이른바, ‘편상거(偏箱車)’라는 것입니다. 진(晉) 나라 때 마융(馬隆)이 이 수레를 사용하여 수기능(樹機能)을 토벌하는 데 있어 천리를 달려가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산악지대이고 도로가 험난하기 때문에 이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북쪽 오랑캐와 교전(交戰)하는 데 있어 이 수레가 아니면 오랑캐 기마병(騎馬兵)의 충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이에 신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장인(丈人)’이란 말과, ‘삼석(三錫)’이란 말은 《주역(周易)》에 나오는데, ‘장인’은 지략과 덕망을 지닌 사람으로서 충분히 삼군(三軍)의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말한 것이고, ‘세 번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은총으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역》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로 해야 하는데 장인이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데 있어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이 길한 것으로서 임금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하였고, 또 ‘임금이 세 번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만방(萬邦)의 백성을 생각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연(燕)’은 연경(燕京)을 말한 것이고,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인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의 왼쪽에 있는데 우리가 출병하여 요동(遼東)ㆍ계주(薊州)의 길을 끊을 경우,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르는 형세를 갖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윤휴]]의 『백호전서』 >그리고 신은 또 듣건대, 옛날에 전쟁을 하는 데 있어 수레로 군대를 이룬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헌원(軒轅)의 제도가 중국을 안정시키고 이적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인데, 후대에는 이 제도가 차츰 사라졌으니 중국이 오랑캐들에게 지탱할 수 없었던 것이 실로 이에 연유한 것입니다. 옛날의 병거의 제도를 갑자기 회복할 수 없으나 병서(兵書)에 기록된 무충(武衝), 부서(扶胥)의 제도와 진(晉) 나라 사람이 말한 마융(馬隆)이 만든 편상(褊箱)의 법은 지금에도 행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제도에 있어서도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 병거야말로 치달리는 오랑캐의 기마병을 상대할 수 있고 화포가 진동하는 위세를 도울 수 있는 것으로서, 신이 전번 상소에 ‘무강거(武剛車) 1천 부대를 편성해야 한다.’고 한 것인데, 오랑캐를 제압할 수 있는 기구가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병거도 또한 적의 침입을 미리 대비하는 데 있어 매우 중대한 기구인데 이는 미리 만들어 비축해야 하고 갑자기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일찌감치 계획하고 전력으로 만들게 하여 일을 당했을 때 사용할 수 있게 하소서. 이러한 일들은 국정(國政)을 도모하는 자의 일로서 신이 말할 만한 것이 아닌데 이처럼 길게 말하였으니, 그야말로 급히 달리며 고함을 지르면서 예모를 차릴 여가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신은 황공하고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재량하시고 살피소서. -윤휴의 『백호전서』 >위청(衛靑)은 무강거(武剛車)로 영채(營寨)를 만들었고, 이릉(李陵)은 대거(大車)로 영채를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형세에 따라 일시적으로 방편을 취한 것이었다. 만약 그것이 일시적으로 쓴 것이라면, 나무통〔木罌〕을 타고서 몰래 건너간 것이나 담요로 감싸고서〔裹氈〕 험한 길을 지난 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마융(馬隆)이 전차를 썼을 때에는 승리하였고, 방관(房琯)이 썼을 때에는 패배하였다. 그런데 가령 마융이 진도(陳濤)에서 싸웠다면 그때에도 반드시 전차를 썼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석관유집』 >옛날에는 병사를 씀에 있어서 처음에 모집할 때는 잘 고르는 데 중점을 두었으니 마융(馬隆)이 표지(標識)를 세우고 골라 시험하였던 것이 그것이고, 이미 모집하고 나서는 기율(紀律)을 엄격히 하였으니 마수(馬燧)가 잘 조련하여 정예로운 군졸로 만들었던 것이 그것이다.-『[[홍재전서]]』 이를 보면 조선시대때도 마륭이 나름대로 잘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좁은 길에서 수레를 썼다는 점에서 산악길이 험하기로 유명한 한반도에서 이를 도입할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감과 논박이 반복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윤휴]]가 저서 『백호전서』에서 마륭의 편상거를 여러번 언급하는데 이때마다 좁은 길에 사용할 수 있고 한반도의 특성과 적합하다고 논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여론이 없던 것은 아니여서 위에 기제된 『조선왕조실록』의 구절 몇개만해도 그런 수레의 효용성에 반박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수레를 제대로 도입하지 않았으니 반대론자들의 승리라 봐도 무방할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