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르크스-레닌주의 (문단 편집) ===== 단계론 ===== 레닌은 자신의 저서 『러시아에 있어서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러시아가 기존의 농경에 기반한 봉건제에서 자본주의혁명의 진입기에 들어섰다고 하였다. 또한 1917년 4월테제에서 2월 혁명의 영향으로 이제 자본주의로의 도약이 완료되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한 혁명적 분위기 조성(Революционная ситуация)에 부응하여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를 산업노동자 계급이 선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멘셰비키와 자주 충돌을 야기하는 입장이었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본주의 발전의 성숙도'와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논함에 있어서 멘셰비키의 주장을 비판했었는데, 이는 멘셰비키가 이 두 가지를 결정론적으로 연계시켜서, "국내에서의 자본주의 발전의 성숙도가 없다면, 사회주의로의 혁명도 또한 절대불가."라는 국민주의·교조주의적 해석을 가했기 때문이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자신의 저서 『국가와 혁명』(Государство и революция)에서 멘셰비키와 이에 동조하는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을 비판하였다. 레닌의 이러한 지론은 생산력 발전을 국가의 단위가 아닌, 세계의 단위에서 보아야 한다는 기준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현재의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단계로 넘어왔다. 생산력의 과잉 시대로 진입한 현 시점에서 혁명의 고조는 제국주의 분쟁의 중심지인 유럽에서 산발적이며, 분산적일 수밖에 없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유럽 프롤레타리아 중에서 가장 계급적으로 각성된 의식을 갖고 있다."라는 그의 언급으로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다. 이후 1년 후인 1918년에 블라디미르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Пролетарская революция и ренегат Каутский)라는 저서를 통하여 독일 내 수정주의자들과 이른바 카우츠키류의 교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이들)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수정주의와 교조주의는 생산력 발전이라는 논의 차원을 오직 국경으로 선이 그어진 국내 안에서의 생산력 발전에 국한한다는 점이서 비슷한 반혁명 사조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번외로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의 아시아 생산양식에 관한 입장을 한번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따르면, 중국과 인도 등과 같은 아시아 국가는 서양의 봉건제와 차별화 된 정체이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유물사관의 입장에 따라 당시 아시아 사회를 노예제와 봉건제의 성격이 혼재된 정체적 사회라고 진단하였다. 그는 이에 기반하여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봉건제의 상태와 다른 것이며, 모든 경제 요소에 대한 소유 권리를 하나의 전제군주에게 전유한 전제주의 체제의 일종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1931년 레닌그라드 회의에서 아시아의 생산양식을 봉건제와 다른, 특수한 무언가라고 보지 않았으며, 카를 마르크스가 동시대에 판별했던 아시아 사회에 대해 '봉건사회'라고 규정하였다. 즉, 스탈린은 당시 아시아에 대해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도식에 맞춰서 해석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동양의 전근대사회의 성격을 서양 봉건사회와 비슷한 단계의 사회로 간주했던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발전론에서 '아시아적 생산양식'은 인정되지 않는다. 스탈린의 해석을 따를 경우 동양의 전근대 국가도 또한 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발전성을 갖추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대산업화 시대 당시 반식민지(反植民地) 대열에 선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전근대의 자국을 봉건사회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들어서 아시아의 생산양식에 대한 카를 마르크스의 해석과 이오시프 스탈린의 기계론적 해석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가령, 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 동양의 사회구성체는 서양의 사회구성체에 비해 뒤떨어진 것이 되며, 동양 사회를 자체적인 발전성이 없는 정체된 사회로 봤다는 점에서 이 사관은 제국주의 침탈에 이용될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또한 후자의 해석을 따를 경우, 동북아 지역의 사회도 봉건사회로 해석할 수 있는데, 당시 일본을 제외한 동북아 사회는 봉건제의 성격보다는 중앙집권적 관료제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췄기 때문에 역시 논쟁의 여지가 크다. 두 문제와 관련된 논쟁은 역사를 보는 관점 중 하나인 역사주의 도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및 비판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레닌은 '혁명적 분위기 조성'이라는 개념과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영향은 전지구적이라는 세계혁명적 관점에 기반하여 10월 혁명을 동부 유럽 지역 사회주의혁명의 시초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의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서유럽에 비해 뒤쳐진 상태란 것은 그도 인정한 바였다. 레닌 사후 이오시프 스탈린이 권력을 잡고, 1928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본주의적 본원 축적을 사회주의적 계획 경제의 방식으로 축적하게 되는데, 1936년 12월 5일 전 연방 소비에트 제8차 대회는 새로운 소비에트 연방헌법(스탈린 헌법)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이 기간을 포함하여 1918년에서 1936년 사이까지를 사회주의 발전 단계라고 규정하게 되었으며, 헌법이 채택된 시점에서 소련은 더이상 자국을 사회주의 발전 단계가 아닌, '노동자와 농민의 사회주의국가'라고 규정하였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사회주의 발전 단계’가 사회주의와 이질적인 특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탈린은 1918년에서 1936년 사이의 사회 구성도 사회주의로 보고 있었으며, 1936년 이후에 대해서도 소련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추축국이 패하고 수많은 동유럽의 국가들이 공산화되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은 동유럽 지역의 혁명을 '인민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였으며, 또한 한반도 이북 지역도 인민민주주의 단계로 규정하여,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따른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러한 '인민민주주의 정부'는 노동자와 농민 뿐만이 아닌, 민족자본가와 양심적 지식인, 그리고 중산쁘띠부르주아의 연합 정권의 형태를 보였으며, 원칙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가 아닌,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단계에 있는 정체였다. 중국의 공산주의 혁명가인 마오쩌둥은 1940년에 펴낸 저서 『신민주주의론』에서 중국 혁명의 성격을 '신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는데, 이러한 이론은 인민민주주의 노선과 맞닿아있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수많은 공산당 통치 국가가 국호에 '사회주의'를 넣지 않고, '민주주의인민', '인민', '인민민주주의' 등을 넣은 것도 위와 같은 단계론에 기반한 것이다. 이 상태하에서 민주주의는 생산수단의 국유화, 하급인민위원회에 따른 지역 관리, 토지개혁 등을 수행하여 자본주의 잔재를 잠식하고 '인민의 적'으로 분류된 집단에 의한 반혁명기도를 분쇄할 수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마련하는 목적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인민민주주의' 또는 '민중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완전히 같은 개념이라고 할 수 없으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나아가기 위한 명확한 목적성을 갖고 있으며, 산업노동자·빈농이 지도하는 혁명적 당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사실상 차별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