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산시 (문단 편집) === 상업의 도시, 경공업의 도시 === 창원에서 마산이 차지하는 산업 비중은 다소 미미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때 '''전국 7대 도시'''[* 단, [[1960년대]]~[[1970년대]] 남한의 이야기다. 일제강점기에는 북한 쪽 도시들이 더 많이 발전했기 때문에... [[전주시]]와 [[목포시]]가 부진해지면서 후에 특별/광역시가 되는 6개시를 제외하고 최대인 7대 도시의 명성에 올랐으나 [[울산광역시]]의 등장에 따라 밀려났다. 1914년부터 1935년 대전, 광주, 전주가 승격되기 전까지는 군산, 목포와 함께 남한 7부였던 것도 사실이다([[개성시]]는 1930년 승격했으며, 진주는 1939년이 되어서야 부로 승격했다. [[흥남]]이 1944년부로 승격 된 것이 마지막. [[http://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C%9D%98_%EC%84%A4%EC%B9%98%EC%88%9C_%EB%8F%84%EC%8B%9C_%EB%AA%A9%EB%A1%9D|#]]).]가 될 만큼 컸던 역사가 있다. 진주를 비롯한 서부경남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물량이 마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입되었기 때문이다. 즉 교역도시로서 발전했다는 얘긴데, 사실 마산의 지리적 위치상 교역의 비중은 [[삼국시대]] 초기의 [[포상팔국]](골포국)에 거론될 정도 크다.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와 [[조선]] 초기에도 상당히 큰 항구였다고 전하며, [[쓰시마]] [[왜구]]들의 빈번한 노략지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장군동 유래가 된 장장군 전설이나, [[최윤덕]] 장군이 북방에서 경력 쌓기 전부터 두각 나타낸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왜구 때려잡던 동네 출생이니까 (정확히는 지금의 창원시 의창구 북면 근방) 조선 후기로 들어오며 어시장과 조운출항지로서 다시 항구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경남선'과 '마산선'의 종착역이자 일본으로 가는 부두의 교역점으로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경남 제1의 도시였다. 1960년대 이래 정부의 정책으로 남동해안공업벨트를 조성하며 상대적으로 당장 쓸 수 있는 토착노동자 비율이 많고, 이미 인프라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던 마산에서는 (초기투자 인프라와 토지가 많이 필요한) 중화학공업 대신 경공업을 육성하게 되었는데, 울산과 여수가 현재까지도 중화학공업을 기반으로 굳건히 남아있는 데에 비해 마산은 창원으로 그 기능이 넘어가며 상대적으로 쇠락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