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중일전쟁|일본의 침략]]을 이용하여 세를 회복하다 === > 일본과 전쟁을 시작할 때 국민당의 병력은 170만 명이었던 데 비해 공산당은 약 4만 명에 불과했다. 전투에서 주된 부담은 장제스의 군대가 짊어졌다. 공산당은 그러한 부담을 질 만 한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후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로 전통적 전투를 치른 쪽도 국민당군이었다. 마오쩌둥의 군대는 일본군 전선 뒤편에서 유격전을 벌였다. 이러한 역할 분담은 전쟁 내내 이어졌다. > > > 1938년 겨울까지 공산당과 국민당의 관계는 비교적 순탄했다. 하지만 1939년 1월 국민당 지도부는 공산당을 ‘습격, 점령, 제한, 대항’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린다. 그달은 장제스의 동의하에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공산당 연락부를 충성에 설립하기로 합의한 달이었다. 국민당 지도부가 이러한 결정을 내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 > > 공산당이 행동의 자유를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일본군 점령지 사이의 빈 공간에 근거지를 설립하며 공산당군 세력을 급속하게 늘리고 있음을 뒤늦게나마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1938년 말이 되면 공산당의 팔로군은 병력이 다섯 배가 늘어나 20만 명에 이르렀다. 2년 뒤에는 50만을 넘어선다. >---- >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2, 교양인, 2019, p.50~51 그러나 [[중일전쟁]] 시기 마오쩌둥은 '''세력의 7할을 세력 확장에, 2할을 반장(反[[장제스|張]])에, 1할을 항일에 쓰라고 지시하면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극도로 회피하고, 도리어 국민당의 유격대와 [[옌시산]]을 비롯한 화북 지역의 국민당군을 괴롭히며 세력 확장에 골몰'''하였고, 그 결과로 중일 전쟁 시작 당시에 4만명에 불과했던 공산당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120만으로 불어났다. 당연히 전쟁 내내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최고조에 다다랐고, 그것이 [[환남사변]]에서 폭발하기도 했다. 과거 장제스가 노는 동안 일본군을 게릴라로 애먹이면서 그 경험으로 [[6.25 전쟁]] 때 [[미군]]과 호각지세로 겨룬 마오쩌둥을 운운하는 찬양성 프로파간다들이 버젓이 있었지만, [[일본 제국]]은 장제스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비적으로 취급했고 1940년 여름에 백단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는 상대도 안했다. 자세한 것은 [[중일전쟁]] 문서에 설명되어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