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6.25 전쟁]]과 참전 === >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 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 >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2, 교양인, 2019, p.137~138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마오쩌둥의 외교적 현안은 이듬해인 1950년 6월 25일에 터진 [[6.25 전쟁]]이었다. 당시 [[이오시프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소련]]은 직접 참전하지 않으려고 했고, ''''마오쩌둥이 참전하지 않으면 [[한반도]]를 포기하겠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스탈린은 대외 관계에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라서 미국과 직접 대결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 특히 스탈린은 한국전쟁 발발 2년 전인 1948년에 있었던 [[베를린 봉쇄]] 사건에서 미국과 서방의 엄청난 힘을 본 후라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피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사실 마오는 전쟁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6주 전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와서, 모스크바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군사 공격을 승인한 상태임을 확인시켜줬다. 1950년 7월 말 북한군이 승승장구하며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자, 마오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보지 못했지만, 마오의 눈에는 북한군의 병참선이 너무 길어져서 미군의 반격에 취약할 위험성이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자, 마오는 동료들에게 만약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승리하면 침략 욕구가 더 커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으며, 어쩌면 미 공군이 만주와 중국의 동부 해안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고, 타이완의 국민당 군대가 중국 본토로 상륙작전을 시행할 가능성도 있으며, 심지어 호찌민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군이 미군과 합동으로 중국 남부와 베트남 국경 지역에서 침공할지도 모른다고도 말했다. [[6.25 전쟁]]도 사실 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에서는 스탈린이 [[김일성]]을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되었지만, 실제로는 김일성이 소극적인 스탈린에게 전쟁 승인을 받으려 했다고 [[흐루쇼프]] 회고록에도 나오고, [[소련 해체]] 후 공개된 기밀 문서에도 나왔다. 스탈린은 그리하여 중국마저 [[북한]]을 돕지 않을 경우 북한 정부와 [[북한군]]을 중국 동북 지방으로 철수시키려고 했다. 다만 스탈린은 중국과 북한 양국의 군사력만으로는 미군을 물리치기는커녕 교착 상태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중국이 북한을 지원하지 않을 경우, 중국 동북 지방으로 망명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고 지원할 경우에도 중국-북한 양국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물론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서 흐지부지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