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중공군의 패퇴 === > 서울뿐 아니라 38도선 동쪽 부분과 북한 영토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참전한 지 4개월 만에 중국은 14만 명의 병력 손실을 입었다. 미군은 38도선을 따라 강력한 요새를 구축했고, 전투는 양측의 기존 위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밀고 밀리는 공방전 양상을 띠었다. 휴전 협상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으나 양측은 모두 아직 타협할 생각이 없었다. 2년 뒤 스탈린이 사망하고 미국에서는 공화당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야, 미국과 중국은 타협이 가능해졌으며 남한과 북한이 모두 반대했지만 한반도의 유혈 사태를 끝내는 휴전 협정에 서명했다. >---- > 필립 쇼트, 양현민, 마오쩌둥 2, 교양인, 2019, p.148 부지불식간에 중국군에게 반격을 받아 패퇴한 유엔군과 미국의 충격은 대단해서, [[1.4 후퇴]] 당시 미국 정부와 유엔군 사령부는 전선이 [[전라도]]의 [[금강]]에 설치된 방어선까지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축차적인 방어를 하면서 [[부산광역시|부산]]까지 후퇴한 뒤 '''최종적으로 유엔군은 [[일본]]으로, 대한민국 정부와 [[한국군]]은 [[제주도]]로 철수한다는 한국 정부 망명 계획을 극비리에 기획하고 있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시행되었다면 [[적화통일|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중공군의 제3차 공세는 공세 실시 전에 현지 사령관인 [[펑더화이]]가 무리한 진격임을 상기시키며 여러 차례 말렸지만,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지속적인 공세를 원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공세를 지속하도록 명령했고, 그 결과 인민 지원군은 [[매튜 리지웨이]]가 이끄는 유엔군의 재반격을 받아 패퇴하여 한반도 중부에서 양군이 교착 상태에 들어가서 남한은 위험한 상황을 무사히 넘겼다. 여기에 대해서는 음모론도 존재한다. 당시 인민지원군의 다수는 국민당 출신이었는데, 이들을 숙청시키기 위해 고의로 소모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는 차차하더라도 자신들을 다시 이역만리로 보낸 옛 국민당군 출신들은 공산당에 회의를 품어 인민지원군 포로의 80%는 대만 행을 택했다. 한편 마오쩌둥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스스로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뜻을 밝힌 큰아들 [[마오안잉]]을 한국 전쟁에 참전시켰다. 마오안잉은 전쟁 도중에 [[미 공군]]의 [[네이팜탄]] 폭격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의 유해를 중국으로 옮길지 여부를 묻는 참모진의 건의에 마오쩌둥은 시신을 [[북한]]에 그대로 두라고 지시하여 현재에도 마오안잉의 묘는 북한에 있으며, 이 묘는 북한과 중국의 혈맹을 상징하는 정치적 장치로 이용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