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스탈린]]의 홀대 === 1950년대 초반까지 [[소련]]은 전세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이념의 조국"이라고 불렸다. [[중국공산당]]도 예외는 아니어서 1940년대 초까지 [[코민테른]]의 지시를 계속 받으며 활동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공산당]] 지도부는 마오쩌둥을 "무식한 농부"라고 무시했다. 당시까지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의 입장은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였다. 그런데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은 이 이론과는 반대로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주축이 되는 혁명을 성공시켰으니 스탈린의 입장에서는 떨떠름했을 것이다. 소련은 마오쩌둥의 혁명이론을 "마가린 사회주의"라고 비판했다. 마오쩌둥은 중화민국 정부와 국민당을 [[타이완 섬]]으로 몰아내고 1949년 말에 장기간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 방문의 목적은 소련에 대해 여러 원조를 받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소련으로부터 수억 달러(현재 시세로는 수십 억 달러)의 차관을 끌어내고 소련에 다수의 중국 유학생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때만 해도 마오쩌둥은 소련과 스탈린에 불만은 있을지언정 디스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소련이 [[미국]]과 직접 맞붙어봐야 손해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중국의 참전을 종용했고 이는 중국 참전의 한 이유가 된다. 물론 마오쩌둥의 가장 큰 이유는 [[북한]]이 망하면 그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작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리 탐탁치 않게 여겨 크게 환영하지는 않았다. 사석에서 스탈린은 마오쩌둥을 "그 놈은 사이비지? 정말 만나기 싫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모스크바에 왔던 마오쩌둥이 얼마나 홀대받았는지 제대로 열받은 마오쩌둥은 "난 여기에 먹고 똥이나 싸려고 온 것이 아니다!"라고 소리를 질러대기도 했다. 그런데 67년 뒤인 2016년에 해제된 극비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이 회담에 앞서 '''진짜로 마오쩌둥의 [[똥]]을 분석'''[[그그실|하고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은 똥을 통해 사람의 심리를 알 수 있다는 루머를 듣고 마오쩌둥의 숙소 화장실에 특수 장치를 설치해 마오쩌둥의 똥을 따로 모았다고 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19회에서 이 내용을 다루었다. 어쨌든 [[동유럽]]의 인구 수백~수천만 정도의 국가들에 비해 세계 1위 인구대국이고 세계 4위의 넓은 국토면적을 가진 중국과 틀어지면 소련도 난처했기에 원조를 했다. 당시 스탈린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교황]]이나 마찬가지였고, 게다가 소련의 국력은 세계 2위였다. [[독소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지만 종전 3년 만에 회복했다. 1위는 당연히 [[미국]]. 때문에, [[중국인]]들은 소련을 자신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여겼다.[[http://naver.me/xaGdX26S|#]] 다만, 스탈린이 중국에 대한 원조를 단행하면서도 중국 당국이 내세웠던 계획 중 과도해보이는 계획에 대해서는 축소했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마오쩌둥이 스탈린의 계획을 지속해서 따라갔다면 중국이 수십년 일찍 경제대국이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1957년에 1936년의 공업 생산량을 뛰어넘는 등 성과는 나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