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제사해 운동]]과 대기근 === 인력이 빠지고 농사에 필요한 도구까지 없애버린 것만으로도 벌써 농업 생산량은 상당히 저조해졌는데, 생태계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마오쩌둥이 '''"[[저 새는 해로운 새다]]"'''라는 교시를 내려서 단 1~2년 만에 전국에서 수많은 [[참새]]가 도륙당했다. [[참새]]가 사라지자 병충해가 들끓었고, 이후 발생한 자연 재해 등의 수해로 인해 작황은 처참한 수준으로 치닫고 이념만 내세운 무자비한 인민 동원과 강제 공동생활 등으로 인해 인민의 고통은 극에 달했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소련에 자신의 정책이 성공한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식량을 가차없이 징발할 것을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1957~1960년 사이에 공식적으로 2천만 명, 학계 추산으로 '''3천~4천만 명, 많게 잡아 7천만 명이라는 역대급 아사자'''가 발생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1980년 당시 중국 공산당 총서기였던 [[후야오방]]이 발표한 수치다. 이제 형편없이 낮은(...) 수치다. 학계에서는 평균적으로 '''최소 3천만'''으로 본다. 경제적 피해도 1000억~1200억 위안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위해 투입한 모든 금액의 2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중일전쟁 전사자가 공식적으로 1200만 명 정도고 학계 연구로도 1400만 명 정도다. 중화민국이 대륙을 통치하고 있을 시기에 내전, 질병, 자연재해, 전쟁 등으로 인한 사망자가 3500만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 대기근은 훗날 옌벤의 [[조선족]]과 [[북한이탈주민]] 사이에 연대 의식이 생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북한은 당시 계획 경제의 효과를 톡톡히 본 덕에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었고, [[김일성]]이 주장한 대로 '[[이밥에 고기국 기와집에서 비단옷]]을 입는 나라'가 '''될 것 같았다.''' 실제로 1980년대 초반까지 북한 경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이때 굶주림에 허덕이던 수많은 [[조선족]]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넘어왔고, 국경 지대의 북한 주민들은 [[우리가 남이가]]라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받은 도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조선족들은 이제 역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다가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들어오는 북한 주민들을 쉽게 내칠 수 없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