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건강의 악화와 [[화궈펑]] 지명 === 이 상황에서 마오쩌둥은 [[1970년대]]부터 [[파킨슨병]] 혹은 운동 뉴런 장애로 보이는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1972년]]에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방중했을 때 마오쩌둥은 공식 석상에 나와 몇 마디 하지도 못하고 [[저우언라이]] 총리가 모든 의전을 담당하였을 정도였다. 사실상 국정은 [[저우언라이]]가 맡아서 했으나, 저우언라이도 방광암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다. 이를 기회로 정권을 노리고 있던 [[4인방]]은 마오쩌둥 사후에 국정 장악을 노렸다. 이를 우려하던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때 실각하여 엔진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덩샤오핑]]을 불러들여 국정을 넘겨주기 시작했으나, 4인방은 덩샤오핑을 잠재적 경쟁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실각시키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사인방의 기대와는 다르게 후계자 자리를 장칭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후배]]였던 [[화궈펑]]으로 지명했다. 당시 화궈펑은 겨우 현 서기 정도였다. 마오쩌둥은 말년에는 말도 제대로 못 할 만큼 건강이 심하게 악화된 상태였는데, 1976년 4월 30일 로버트 멀둔 뉴질랜드 총리와의 회담 이후 [[화궈펑]]에게 "천천히 하고 서두르지 말라. 과거의 방침에 따라 일을 처리하라. 네가 일을 하면 나는 안심이다."라는 메모를 건네 화궈펑에게 힘을 달아 주었다. [[저우언라이]]는 1976년 초에 먼저 [[사망]]했고, 저우언라이를 추모하기 위한 인파가 [[천안문 광장]]에 모이자 4인방은 이를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 그리고는 이 혼란의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해 마오쩌둥의 이름으로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 [[파일:external/iconicphotos.files.wordpress.com/mao-butto.jpg|width=100%]] || || 1976년 5월 27일에 [[줄피카르 알리 부토]] 파키스탄 총리를 만나는 마오쩌둥의 모습이다. 한 눈에 봐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며, 결국 이것이 마오쩌둥의 마지막 공식 일정이 되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