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오쩌둥/생애 (문단 편집) === [[난창 폭동]]의 실패와 마오쩌둥의 선출 === 이후 공산당은 보복을 위해 1927년 8월 1일 [[난창 폭동]]을 일으켰으나 참혹하게 실패했다. 이에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가 소집되어 [[천두슈]]는 실각했고 [[취추바이]]가 총서기에 올랐다. 이때 취추바이의 눈에 띈 마오쩌둥도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취추바이 역시 폭동과 봉기를 통한 혁명전략을 지휘했고 9월 9일 마오쩌둥도 고향인 후난성에서 [[추수폭동]]을 일으켜 장사의 점령을 시도했으나 [[국민혁명군]]에게 완패하고 마오쩌둥도 사로잡혔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주했고, 이후 패잔병을 규합하여 후난성 남방에 있는 장시성으로 도피, 징강산(정강산)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자신들을 중국 공농 홍군(홍군)이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이후 비슷하게 쫓겨온 [[주더]]가 이에 합류해 세력을 확장한다. 중국공산당은 해풍 폭동, [[광저우 폭동]] 등을 전개하면서 총폭동 노선을 지시했으나 모두 국민정부에게 참혹하게 진압당했으며 [[장타이레이]], [[펑파이]] 등 주요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전체 당원의 80%가 처형당하는 등 세력이 급감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저우언라이의 지시로 한동안 세력을 확장한다는 노선을 추구했으나 [[중원대전]]과 대공황에 고무된 코민테른의 지시로 [[리리싼]]이 다시 총폭동 노선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1930년 [[창사 폭동]]을 일으켰고 마오쩌둥도 참여하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아내인 [[양카이후이]]는 창사 폭동의 직접적 피해를 입은 후난성 정부주석 [[허젠]]의 지시로 체포되었고, 마오쩌둥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부하면서 아들 [[마오안잉]]이 보는 앞에서 총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