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중잉 (문단 편집) == 생애 == 1912년 청해성에서 서북의 대군벌 [[마부팡]]의 사촌으로 태어났다. 10대의 나이로 삼촌 [[마치(1869)]]의 휘하에 종군하여 청해, 감숙, 수원 등지에서 기병대 지휘관으로 대활약했으며 1927년 [[펑위샹]]에 대항하는 [[황하사변]]을 일으켰지만 삼촌인 [[마린(1873)|마린]]과 [[마훙빈]]에게 진압당했다. 1929년 난징의 중화민국 육군 군관학교에서 공부했다. 1929년, 국민정부로부터 17세의 나이로 국민혁명군 36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젊은 나이에 대단한 군공을 세웠기 때문에 어린 장군, 대마(大馬) 등의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1931년 봄, 그의 야심을 경계한 사촌 마부팡과 마부칭의 압력으로 감숙성으로 밀려났으며 1931년 [[하미시|하미(쿠물)]]에서 봉기를 주도한 율바르스 칸의 원조 요청에 응하여 [[진수런]]에 대항하여 신강성을 침공하였다. 1931년 여름, 500명의 선봉 기마대를 파견하여 하미로 이어지는 서향 도로에서 진수런의 군대를 습격하여 많은 무기를 노획하고 신병들을 모았으며 니야즈 호자의 위구르인들과 함께 다시 하미를 포위하고 바르콜을 공격했다. 진수런은 마중잉을 상대하기 위해 계속 부대를 파견하였으나 마중잉은 이들을 잇달아 격파했다. 그러나 하미 공격에서 하미의 지휘관 장페이위안과 백계 러시아인 난민 출신 군인들의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다시 감숙성으로 퇴각했다. 감숙성에서 요양하는 동안 마중잉은 중대장 마스밍을 파견하여 니야즈 호자와 율바르스 칸을 원조하게 하였고 1933년 1월, 6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다시 신강성으로 진공하여 신강성 동부를 점령하였다. 이때 마중잉의 명성은 매우 높아져서 회족의 구심점이 되니 마니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1933년, [[4.12 디화 정변]]이 일어나 [[성스차이]]가 신강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자 마중잉은 성스차이와 담판하여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1933년 10월, 협정을 깨고 성스차이를 격파하고 우루무치를 포위했다. 12월, 성스차이가 [[소련]]과 협정을 맺어 소련군 8여단을 이끌고 반격하자 1934년 1월, 공군과 장갑차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크게 패하여 신강성 남부로 밀려났다. 소련과의 거듭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부상당한 마중잉은 회족들에게 외면받게 되었는데 소련은 명망이 높은 마중잉에게 소련으로의 망명을 타진하였다. 가망이 없다고 여긴 마중잉은 이 제안에 응하여 28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소련 대표단의 안내를 받아 소련으로 망명하였고, 소련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았다. 이후 마중잉은 모스크바로 이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으며 소련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군관이 되었는데 소련군 기병장교 제복을 입고 있는 자신의 사진과 서신, 음성녹음을 호탄에 주둔한 36사단의 잔존세력에게 보내면서 한동안은 연락을 취했으나 1937년 이후 완전히 소식이 두절되었고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1936년에서 1937년 시점에 소련군에 복무하던 중 전사했다는 풍문이 들려오기도 했으나 검증된 바는 없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전투기 조종훈련을 받다가 사망했다는 설과 [[스페인 내전]]에 파견되었다가 죽었다는 설, [[독소전쟁]] 중 전사했다는 설 등이 있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지시로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는데 자세한 정보가 발굴되지 않아 미궁 속에 빠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