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초 (문단 편집) === 죽음 === 221년, 표기장군, 영(領) 양주목[* 이것은 굉장히 많은 부분을 시사하는데 이 양주목(양주자사) 자리는 촉한의 북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주로 받은 것이다. 대표적으로 위연이나 강유를 들 수 있다. 근데 이들도 '영 양주자사' 였을 뿐인데 마초는 그냥 ''''영 양주목''''이다. 제갈량의 '영 익주목'을 생각해보면 마초의 계속 살아 그 위치에 있었다면 향후 있었을 촉한의 북벌에서 마초의 역할과 위상이 엄청났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혹자들이 주장하는 마초 홀대설을 부정하는데 있어서 강력한 근거자료다.] 으로 올리고 태향후로 올려 봉했다. 222년에 죽으니 이때의 나이가 47세였다. 죽음에 임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신의 종족 2백여 명이 맹덕(조조)에게 주살당해 거의 다 없어지고 다만 종제 [[마대]]가 남았으니 미천한 종족을 위해 제사가 이어질 수 있도록 폐하께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그 외에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유비의 수하가 된 후 마초는 다시 가정을 꾸려 아들 [[마승]]을 얻어 그가 후사를 이었지만 마승이 어린 탓에 [[마대]]에게 가문의 제사를 맡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비에게 귀순하고 새로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고 222년 마초가 죽었으니 아이의 나이를 높게 잡아봐야 8세다.] 마초의 유언은 일가들의 무사함만을 비는 가장의 약한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원]] 이래에 명가로 유명했던 한양 마씨의 후예이자 한때 관중을 호령했던 관중 제장의 맹주가 남긴 유언이라기에는 처량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마초는 한중 면현 정군산 부근, 뇌공산에 묻혔다. 면양 [[무후사]]와 약 1km 떨어져 산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한수를 사이에 두고 관자산의 여랑사(즉 [[장로(삼국지)|장로]]의 딸 [[장기영(삼국지)|장기영]]의 묘)가 있다. 시호를 추증해 위후(威侯)라 했다. 아들 [[마승]]이 후사를 이었다. 마대의 관위는 평북장군에 이르렀고 진창후로 올려 봉해졌다. 마초의 딸은 안평왕 [[유리(삼국지)|유리]]의 배필이 되었다.[* 유리가 요절하는 바람에 딸은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유리의 사망연도가 244년인데 가정을 꾸렸을 때가 214년 이후라 보면 당시 마초의 딸은 적어도 30세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마초의 요절은 유비와 촉에 있어서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일인데 마초가 사망한 시기는 이릉대전이 발발한 시기다. 이 무렵 촉은 관장황이라는 1세대 핵심 지휘관들이 순차적으로 사망했다. 마초는 관장마황조 중 가장 젊었다고 할 수 있기에 살아있었다면 이릉대전에서 크게 역할을 하거나, 특히 북벌 때는 마초 자신의 [[연고지]]였던 옹양주에서 일어나는 전투에서 중요한 비중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결국 요절하면서 이릉대전 전후를 기점으로 관장마황조 중에선 조운만이 남았고, 몇 년이 지난 1차 북벌 이후에는 조운까지 사망해 이들은 모두 역사에서 퇴장한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제갈량의 북벌]] 시기 인재 부족에 시달리던 촉으로서는 마초를 비롯하여 형주 공방전부터 이릉대전까지 잃어버린 인재들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내상이었다. 살아남은 2세대 장수들인 왕평, 요화, 마충, 장익, 장억, 위연 등의 활약이나 공적을 보면 잃어버린 인재들이 더더욱 아깝게 느껴진다.[* 마초는 제갈량보다 5살 연장자였다. 관장황조 등 1세대보다는 제갈량을 비롯한 2세대들에 더 가까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