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초 (문단 편집) === 패륜아 논란 === ##들어가기 전에: 본 항목은 삼국지 팬덤 사이에서 논란과 분란의 여지가 다분한 예민한 대목이고, 또한 같은 사서상에도 상충되는 기록들이 존재하기에 일방적으로 단정짓기 어려워 수많은 수정전쟁이 교차했습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소설인 '''삼국지연의'''가 아닌 '''정사 삼국지 및 자치통감, 호삼성 음주''' 등의 사서상 기록을 기반으로 작성된 것임을 유의하기 바라면서 읽고 참여하기를 권장하며, 사서상 기록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주관적인 판단에 근거한 서술은 삼가해주십시오. 일단 정사에서 마초의 행동으로 인해 그의 일족과 부하들이 위해를 당한 비극이 여러번 언급된다. * '''마초는 아버지 마등 등 자신의 일족이 중앙권력에 출사해 있는 상태에서, 즉 적의 손아귀에 인질로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그 여파로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조조에게 몰살되었다.'''[* 이 대목이 마초가 패륜아로 비판받는 가장 큰 근거이다.] * 위략에 따르면 마초는 처음 한수와 결탁할 때, 한수에게 자신의 부친을 버리고 한수를 부친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한수가 마등의 처자식을 죽인 적이 있는데도 그와 결탁한 것이다. * 패륜'''아'''로서의 행동은 아니나, 한중을 탈출해 유비에게 귀순할 때 첩 [[동씨]], 아들 [[마추]]를 버리고 갔다.[* 이때, 부하 [[방덕]]도 함께 남겨진다.][* 다만 이는 장로에게 주변에서 마초는 어버이를 버린 인간이니 믿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하여 장로와 사이가 벌어졌던 상황에, 장로의 지원군을 받았음에도 양주를 공략하는 데 실패했고, 장로의 장수인 양백이 마초의 유능함을 시기했기에, 이런 불리한 상황을 버티지 못한 마초가 저족에게로 달아났다가 결국은 유비에게 귀순했던 상황이다. 한마디로 장로군 내부에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던 마초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자기에게 호의적인 저족에게 도망가야 했을 정도로 마초의 상황이 좋은 게 아니었는데 유비의 제안으로 한줄기 구원을 얻은 셈인 것이다. 사실 이 점도 다시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당시 유비세력의 정황상 마초에게도 믿을 구석이 있었다. 유비 세력의 우선적인 대전략은 일단 기본적으로 형-익을 아울러 천하를 삼분해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것이고 당시 파촉까지 얻은 상황에서 유비군이 이 계획에 따라 바로 얻어야 하는 곳이 [[한중]]이다. 따라서 유비 세력은 바로 한중에 있는 장로세력을 포섭하거나 공격해야 했는데 시간상으로 한중 옆에 있는 유비세력이 장로를 포섭하거나 공격할 시간은 충분히 있었고, 유비 세력에서 고위급 위치에 서게된 마초 입장에선 일단 유비에게 귀부해 일신의 위험을 피했으니, 얼마 후 유비가 한중을 얻으면 자연스럽게 가족과 심복을 돌려받을수 있는 공산 역시 충분히 있다고 나름대로 계산이 서기도 했을것이다. 그러나 얼마후 급작스럽게 형주에서 익양대치가 발생해 유비는 거기에 신경을 집중해야 했고 이 사이 조조가 한중으로 치고 들어가 한중을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만다. 유비는 익양대치 직후, 뒤늦게라도 [[황권]]의 조언에 따라 장로가 조조에게 패해 파중현으로 들어올 때 장로를 영접하려고 했으나 황권이 도착하기 전에 장로는 남정으로 돌아가 조조에게 투항해버렸는데 이 과정에서 마초의 아들 마추는 죽고 수하였던 방덕은 조조의 신하가 되어버린다. 214년 당시 유비에게 귀부하던 마초 입장에서 그 다음해 발생할 갑작스러운 익양대치나 장로의 동생 [[장위]]가 천혜의 요새지인 양평관에서 삽질(...)을 해서 장로가 제풀에 무너질것을 예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유비 입장에선 이후 한중을 공격해 조조의 최고위 상장 하후연을 죽이고 친정한 조조를 격파함으로써 세력에 최고조에 오르는 전화위복의 기회가 되었다지만, 마초 입장에선 또 다시 가족을 잃고 심복까지 잃는 통탄할 일이었다.] 이렇게 정사에서는 그의 아버지와 일족을 버린 마초의 패륜을 언급하는데 사실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패륜행위로 비난 받을 일들이 있었다. * 부하의 의견을 듣고 마초를 사위로 삼으려는 계획을 철회한 [[장로(삼국지)|장로]]부터가 원래 [[유언(삼국지)|유언]]의 부하였는데 유장이 유언의 뒤를 잇는 정권이양기의 공백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오두미도]]를 중심으로 '''한중 일대를 독자 세력화하면서 유장의 말을 무시하여 모친을 비롯한 일족 전체를 상대로 결과적으로 패륜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다.''' 마초를 비난한 장로임에도 마초와 가장 유사한 행동을 하였다는 점이 특이사항이다. * [[원소(삼국지)|원소]]는 원봉의 얼자로 이미 죽은 원성의 가문으로 입적된 상황에서 6년상을 치루어 효자로서 명성을 올렸었다. 하지만 동탁이 정권을 잡자 일족이 경사에 있으면서도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몸을 빼 관동에서 거병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모아 조정에 적대하면서 정작 당시 '''[[동탁]]의 위세 아래에 있던 친어머니와 일족 50인이 몰살 당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동탁이 자리잡은 정부의 칙사를 살해하는등 기세가 등등하였다[* 다만, 이쪽은 [[동탁]]이 워낙 [[천하의 개쌍놈]]이었던 것을 감안하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들이 [[김정은]]에 의해 납북되었을 때, 가족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일본을 공격한다|북한을 공격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을 마냥 뭐라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이 셋 중에서도 당대엔 유독 마초의 패륜행위가 자주 비판되었다. 그 사정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 [[양부]]가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했다고 언급한다. * [[강서]]의 어머니가 마초를 꾸짖으며 부친을 배반했다고 언급한다. * 장로는 마초를 높게 평가해 자신의 딸 [[장기영(삼국지)|장기영]]과 결혼을 시키려고 했으나 마초가 가족을 아끼지 않는다고 반대하는 의견을 듣고는 생각을 바꿨다. 이는 마초의 전처가 적에게 죽었는데 장로의 딸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이다. 역시나 마초는 유비에게 투항할 때 처자를 버리고 갔다. 그런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당대에 마초를 주로 패륜아로 비난하던 이들은 그와 대결하던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이나 그들의 가솔들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장로의 경우엔 본인 스스로가 이미 마초와 같은 전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에 더더욱 마초를 꺼리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대에 또 다른 군웅인 [[유비]]의 경우 그의 불효를 논하기보단 그의 재능이나 위명에 관심을 두어 마초를 얻자, 내가 익주를 얻었다며 기뻐한 사실도 분명 존재하였다. 또 마초가 일족을 배반했어도 농서지방의 수많은 호족들이나 이족들은 여전히 마초를 따르며 그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명성 항목에도 나오지만 그가 주로 패륜아 소리를 들었던 건 조조 휘하 지방 속관들 상대였을 때였고 무조건 당대에 패륜아라고 매도당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측면으로 봐도, 마초가 가족에 대해서 무조건적인 냉혈한만으로는 볼 수 없는 대목도 존재한다. * 마초가 양주를 잃고 한중으로 도피했을때 눈치없이 정월을 쇠자는 첩 동씨의 동생 [[동충]], 그러니까 처남의 부박함을 꾸짖으며 죽은 가족들을 생각하며 오열했다. * 임종을 앞두고 유비에게 일족이 [[마대]]밖에 안 남았으니 종족의 제사가 이어지게 해달라고 서글픈 유언을 남겼다.[* 패륜아 논란때문에 부각되지는 않지만 삼국지 시대에서 친족이 여러 번 잃은 비운의 삶을 살아간 사람이기도 하다. 유언자체도 남은 일족을 보호하려는 모습이다.] 또한 마초 이외에도 당시 인물들 중에는 장로, 마초, 원소급은 아니지만 가족을 저버린 패륜행위로 비난받을 일들이 있었다. * [[제갈각]]은 [[손권]]의 의심 혹은 숙청을 피하기 위해 장남 [[제갈작]]을 독살했다. * [[왕이(삼국지)|왕이]]는 마초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자식을 인질로 보내는 걸 허락했고 아버지 조앙이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자 '''그런 자식이야 군부보다 더 중하냐면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왕이가 [[조월]]의 계모도 아니고 엄연히 친모인데 이런 말을 했는데 조월이 왕이한테 무언가 잘못해서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일까? 오히려 이후 마초는 자신의 가족들이 왕이에 의해 죽었을 때도 조월을 죽이지 않았고 왕이가 마초를 계속 공격하자 그제서야 죽였다. 그럼에도 그는 절개높은 부인으로서 [[황보밀]]의 열녀전에 실렸다. 왕이는 마초의 처를 친구로 두고 친구를 배신했고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볼모로 둔 아들을 끝내 외면했으니 그녀가 저지른 일이 결코 작지 않다. 특이 이 부분은 왕이 역시 마초를 군부와 아버지를 버린 자라며 비난한 자들과 연계한 사람으로서 이런 행동을 했다는 점에서 마초를 비난했던 자들이 무작정 마초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처지는 못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마초와 연합한 [[한수(삼국지)|한수]] 역시 업에 자기가 볼모로 보낸 자신의 자손들을 조조에게 잃었다. 한수 역시 조조에게 위협을 느끼고 부하인 [[염행]]이 마초와의 동맹을 말렸음에도 자진해서 연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한수의 상황이 더 웃기는 건 동관 전투 이후, 염행을 사위삼아 자기처럼 가족을 조조에게 잃게해 '불효자'로 만들어 자신에게 복속시키려는 한수와 마초와 한수의 친족들은 아무렇지 않게 죽였으면서도 친 조조 성향 관중군벌인 염행에게는 특별히 회유책을 구사해 '불효자가 되어선 안되지 않겠냐?'고 은근히 볼모로 잡힌 가솔들에 대한 협박과 이간책을 동원하는 조조간의 정략싸움 때문이다.[* 사실 한수는 마등과도 서로 가솔들을 죽이면서 의형제라는 이상한 관계를 맺었던 작자이다. 이런 염행 상대의 장난질이야 이상할 것도 없는 셈. 조조야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이 두 명의 늙은 능구렁이들에게 이용당하던 염행이 가족 때문에 오락가락 하다 결국 주인인 한수에게 반기를 들고 그게 실패해 조조에게 귀순하는 장면은, 후한 말 이 시대에 효(孝)라는 가치가 얼마나 정략적으로 이용되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염행이 불충이냐 불효냐 사이에서 고민하며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불충'을 선택하며[* 사실 한수의 '사위'였기에 '불효'도 되는 셈.] 괴로워하는 장면은 한때 그와 단기접전을 벌인 '불효자 패륜아' 마초가 나중에 '일가친척이 다 죽었는데 기뻐할게 뭐가 있느냐?'면서 피를 토하면서 통곡한 장면과 묘하게 오버랩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분명 마초의 행위는 어리석음의 발로이자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당대에도 마초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패륜아, 냉혈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투영된 건 사실이다. 경위야 어찌되었든 마초가 스스로의 결단으로 패륜을 저지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인간적 감정이 없는 냉혈한으로 치부하는 것은 남겨진 기록을 봐도 무조건적으로 그렇다고 볼 순 없다. 차라리 경솔한 행동으로 인해 일족을 멸하게 했다는 것에 더 가깝다고 하면 모를까. 당대에도 이와 같이 자신의 결단으로 인한 결과로 가족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았다, 또 굳이 마초 같은 사례가 아니더라도 이 혼란한 시대의 사람들이나, 군웅들에겐 그럴 의도가 있던, 혹은 그렇지 않던 종종 이런 종류의 일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관서 군벌이 봉기한 이유에 대해선 조조의 계략이라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이 >장로가 한중을 점거하니 3월에 종요를 보내 장로를 토벌했다. 공이 하후연 등에게 하동(河東)에서 나와 종요와 합류하게 했다. 이때 관중(關中)의 제장들은 종요가 습격하고자 하는 것으로 의심하니, 마침내 마초가 한수, 양추, 이감, 성의 등과 함께 모반했다. 라는 무제기의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관중 군벌이 조조가 종요로 하여금 한중을 토벌할 것을 명했을 때, 이것이 양주 군벌들을 자극하여 조조가 습격하려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이것을 바탕으로 조조가 이를 기회로 반란을 유도했다는 의견을 보이는데 실제로 원나라 시기에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학자 호삼성은 이를 조조의 허허실실에 의거한 계략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된 또 다른 기록이 [[고유]]전으로 이에 따르면 '고유가 간언하여, 지금 거대한 군대를 함부로 파견한다면 서쪽에 있는 한수와 마초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게 되어 장차 서로 선동하여 반역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우선 삼보(三輔)를 불러 모아서 삼보가 평정시킨다면, 한중은 격문만을 보내도 평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위기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고 한다. 조조의 한중진공을 두고 조조 진영에서도 이쪽이 한중을 공격하려고 군대를 동원하면 관서가 반드시 위협을 느껴 공격할테니 한중보다 먼저 치자는 주장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군벌들이 장로를 치려고 준비하는 것을 곧 관서 토벌의 징조라고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 당시 관서 군벌과 조조의 조정세력은 언제라도 서로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팽팽한 긴장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이며 정사에 남아 있는 기록들만 조합해도 이런 긴장 관계가 표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호삼성의 서술대로 마초가 조조의 선제도발 혹은 계략에 말려들어 자기 영역을 보존하려고 수동적으로 봉기한 군벌이라는 시각을 강화한다면, 마초의 행적은 분명 변호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마초는 조조와의 전쟁이 장기화되자 먼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요청하고 자신의 영토를 보존해 줄 것을 청했다, 즉 마초 역시 처음부터 자신의 가족이 죽을 때까지 싸울 생각은 아니었던 것이며, 조조는 마초의 타협안을 거절하고 후일 마초가 격파되고 관서지방으로 도주해 천수에 도착하자마자 인질은 필요없다는 식으로 그제서야 마등의 일족을 죽인다. 물론 이는 군벌연합체의 수장으로서 전쟁의 장기화에 따른 구심력 와해를 우려한 제스처일 수 있겠지만 애초에 마초의 봉기가 조조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의지에서 기인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그리고 마초가 유비에게 투항할 때 부하 방덕을 버리고 갔다고 비판하는 시각이 타당하다면 유비 역시 [[전예]], 진군, [[진등]]같은 특급 인재들을 버린 셈이 된다. 피치못할 사정으로 데려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가족조차 데리고 가지 못했을 정도였는데 방덕과 같이 유비에게로 귀순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장로, 원소와 같이 마초와 비슷한 경우가 있었고, 꼭 "패륜아"에 해당하진 않지만, 조조, 유비, 손권의 경우에도 세력화와 권력화의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친인척이 위기에 빠지는 일이 있었다. 특히 원소와의 비교가 볼만한데 분명 마초와 같이 그 역시 중앙정부에 봉기하여 인질로 잡혀 있던 일족을 죽게 하였음에도 그는 오히려 충신열사로 명망을 더하고 패륜아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원소가 6년상을 치르면서 천하에 효행으로 이름을 높은 '''명망''', 역적 동탁을 죽여 나라를 평온케 한다는 '''명분'''이 마초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초와 비교하면 마초는 기껏해야 관서의 군벌 중 일부로 봉기 당시에는 오히려 한수가 더 명망이 높았던 상황이었으며[* 물론 이건 상대적인 비교로 주유가 언급했듯이 마초 역시 이전부터 관서의 대표적인 군벌로서의 명성은 있었다. 다만 한수는 워낙 오래전부터 마초보다 관서에 오래있으면서 그 지역의 유력자로 존재했기에 연륜의 측면에선 마초가 밀릴 수 밖에 없다는 것, 마초가 이후 한수를 넘어설 정도로 명망이 올라간건 오히려 조조와 싸워 조조를 곤경에 몰아붙인 덕이 컸다.] 명분 역시 '''관서군벌의 안전'''이라는 명분으로 원소의 ''''동탁이라는 천하를 혼란케 하는 대역적 토벌''''보다 그 명분이 부족한 편이었다. 또 원소는 천하의 공적으로 찍인 동탁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그와 타협은 안한다!'는 자세로 갔지만 마초는 계속 협상을 요구하고 화해를 하려고 하면서 아울러 인질을 계속 요구하였는데 이는 업으로 가 있는 인질화된 일족에 대한 보험을 필요로 했다는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다. 마초는 이쯤하면 우리가 그만두겠다는 자세를 취했으니 어쨌든 아직 천자의 신하로서 천하를 주무르던 조조에게 타협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가 한때 조조를 도와 [[고간]]과 [[곽원]]을 격파한 적도 있었으니... 결국엔 유사한 상황이어도 원소는 원씨 일족이 몰살당한 것에 대한 동정표가 더해졌으나 마초는 아비를 죽게한 패륜아 소리를 들었다. 한대의 법률에는 아무리 큰 죄를 저지른다 해도 어린아이와 늙은이에게 까지는 연좌시키지 않았으나 후한쯤 가면 거의 사문화 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원소의 일족이 몰살당할때는 '''이 규정으로 인해 원소가 동정을 더 받았었는데 마초는 그렇지 않았고 그냥 닥치고 욕을 먹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또. 생각외로 중요한 두 사람의 차이점인데 마초는 아버지를 비롯한 일족들이 자기들 의지로 중앙에 가 있는 것이었기에 자신이 간섭해 여기에 머무르라고 할 상황이 되있지 못했다. 이후 중앙에 위협에 맞서 봉기한 이후 화해를 청하고 이쪽에서도 향후를 대비한 인질을 받아내려 했다. 또 마초는 아비를 버리고 한수를 아버지로 섬긴다고 말로만 그랬을뿐이지, 실제로는 서로를 전혀 믿지 못해 내분을 일으켰다. 한수가 마초의 말을 무시하고 작전을 내리거나 가후의 간단한 이간책으로 만으로도 아비라고 불리던 한수를 친 마초이다. 이랬는데 아버지 운운은 그저 당장이라고 무너지기 쉬운 관서군벌들의 집합을 결속하려는 말 이상은 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관서군벌의 수장으로서 아직 젊었던 그는 모래알 같은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자신과 버금가는 세력의 한수와 연합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결국 그것때문에 무너졌다는 것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소는 당시 수도를 관장하는 사례교위였고 수도에서 몸을 뺄 때 동탁이 그의 명망을 보고 함부로 죽이지 못하고 바로 발해태수가 되었었으므로 일족을 소수라도 수도에서 빼낼 시간은 많이 있었다, 즉, 그는 동탁과 맞설 작정을 했고, 일족을 빼낼만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거병하기 이전에, 친어머니를 비롯해, '''단 한명의 친족도 동탁의 위협에서 빼내오지 않았다'''. 더욱 섬뜩한건 이런 지경임에도 그는 여전히 효자라며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원소는 이런 원가의 몰살로 인한 동정과 그 자신에게 주어진 원가로서, 효자로서의 명망으로 인해 마초와 달리 엄청난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성공하고 [[유우(삼국지)|유우]] 옹립 실패 이후에도 이런 명성을 바탕으로 하북을 제압하는 등 강한 결집력과 독재적인 카리스마를 유지할 수 있었다. 결국 그 독재적인 행동으로 인해 무너지지만 같은 처지에 처한 두 사람의 행동이나 처지가 완전 달랐다는 점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앞 문단에 언급된 바와 같이, "역적의 토벌" VS "관서군벌의 안전" 이라는 명분의 차이와 더불어, 당시 원소는 6년상이라는 고행에 가까운 행위를 하면서 얼자 신분을 걷어내고 얻어낸 당대의 효자라는 명성도 있었기에, 원소의 행위로 인한 일족의 몰살은 마초와 달리 당대 인사들에게 오히려 동정을 샀다. 반면, 마초의 경우는 위의 명분의 차이에 더불어서, 마초 본인의 일가가 강족의 피가 섞인 이민족이었고 심지어 [[마등]]의 경우도 자기 아들과 똑같이 중앙정계에 반란을 일으켰던 군벌들 중 하나였기에 이런 동정을 받지 못하고 결국 '반 이민족이자 반란군 자식 놈이 괜히 봉기해 일족을 죽게 했다'는게 더 부각되었다. 실제로는 비슷한 행위임에도 평가가 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가 있던 것이다. 굳이 더 따지면 한 사람은 오히려 어떻게든 자신의 영역을 지키고 사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협상을 하고 다른 한쪽은 겉으로는 역적을 친다는 명분하에 자신의 야망을 위해 가족이 어떻게 되던 말던 밀어붙였음에도, 세간의 평가는 완벽히 정반대로 흘렀던 것이다. 이런 [[마초(삼국지)|'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일족을 버렸음에도 결국 효와 일족에 대한 정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던 자']]와 [[원소(삼국지)#s-1.1.7|'효를 자신의 입신양명에 철저히 이용한 자']]의 대비되는 평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어찌보면 마초의 패륜아 논란은 명분으로서의 효와 실제적인 당대 인물들의 행동이 괴리되었던, 유교의 효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이용되어 모순을 보였던, 혼란한 한 시대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마초는 융족을 믿고 용맹에 힘입어, 그의 일족을 뒤집었으니, 애석하구나!(그러나) 곤궁함으로 인해 편안함에 이를 수 있었으니, 오히려 낫지 않은가!"'''라고 평가했다. 진수는 위진 정통론자이며 유교적 가치가 절대적이던 시대에 살았던 선비답게 어떠한 인물을 평가할 때 유교적 가치에 입각해 품성과 도덕성을 매우 중요시 한 사가였다. 그래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인격에 하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비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가령 당대 이미 전 중국 최강의 무장으로 높게 평가되던 만인지적 [[관우]]와 [[장비]]와 같은 경우라도 그들의 군재와 무용, 주군에 대한 충성심 같은 장점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들이 인격적 결함 때문에 곱게 죽지 못했다는 식으로 거침 없이 비판했다. 반대로 단독으로 일군을 이끈 경험이 별로 없어서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엔 논란이 있는 촉한의 [[조운]]이나 무장으로서 군재는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한 조위의 [[하후돈]] 같은 경우는 그들의 고결한 품성과 충성심, 인격을 높이 사 종합적으로 매우 후한 평가를 해주었다.[* 물론 [[서주 대학살]]을 자행하는 등 무고한 민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전적에 있어선 [[동탁]]이고 [[이각]]이고 [[곽사]]고 [[공손찬]]이고 뭐고 다 초월해 당대 no.1인 [[조조]] 같은 경우는 별 비판 없이 초세지걸이라는 둥 찬양 일색인 예외적인 케이스도 있긴 하지만, 정작 무제기 본문엔 [[진수(역사가)|진수]]조차도 서주 학살에 대해서는 '잔륙(残戮, 잔인하게 도륙했다, 학살했다)'이라는 잔학한 뉘앙스로 기술했는데 정사 삼국지에서 저런 식으로 학살을 표현한 건 이게 유일하다. 역적으로 욕먹던 동탁의 양성 학살도 이 정도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상당히 드라이하고 간결한 문체로 유명(그래서 후대 유송의 3대 황제 유의룡이 읽다가 너무 간결해서 사건을 제대로 알기 힘들다는 이유로 배송지에게 주석을 달게 했다.)한 정사 삼국지의 레토릭을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으로 엄청나게 부정적인 뉘앙스의 단어를 총동원해 정론직필 한걸 보면 그 폭거를 일으킨 조조에 대해 정말로 어떻게 생각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깐깐한 진수이기에 정말로 당대 사람들에게 마초가 패륜아로 이미지가 고착화 됐다면 당연히 마초를 혹평했을 법도 한데 정작 진수는 마초를 평할 때 마초와 극렬히 대립했던 조위 영향권 옹양주 명사들의 시각처럼 마초의 행적 가운데 패륜적인 측면을 부각하고 비판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용력과 이민족들의 인심에 의지해 군을 일으켰다 일족을 망치고 그런 곤궁함에 인해서야 태평한 방향으로 나간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으로 여긴 걸 보면 당대 사람들이 마초를 진정 어떤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는지 그 단초를 알 수 있다. 진수의 이 평가가 실제 마초의 인물상에 가장 근접한 묘사일 듯 싶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