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초 (문단 편집) ==== 동관 전투 ==== 이후 조조는 한중정벌 계획을 기획했는데 한중 정벌 계획은 유장과 그 부하들이 경계를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헌데 유장 외에도 또 다른 세력 또한 조조의 서진(西進)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니, 다름 아닌 관서군벌들이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조조가 강남 정벌을 단행하기 위해 남하하기 직전이었던 건안 13년(208년), 관중의 제장 중 한 사람이었던 마등은 병력을 장남 마초에게 넘기고 업성으로 들어왔다. 더불어 아들 마초를 편장군(偏將軍)에 임명하여 량주에서 마등의 세력을 이어받도록 해 준다. 즉 조조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영향력 아래 들어간다는 걸 보여준 셈이다. 조조는 보답으로 마등에게 위위(衛尉)라는 지위를 주었는데 구경(九卿)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대군이 강남으로 내려간 뒤 관서군이 준동할 것을 두려워한 조조가 마등을 조정으로 소환한 것이다. 본래도 하동에서 곽원을 상대로 싸울 때부터 조조와 친분을 다져놓기로 방침을 정한 데다, 위위라는 높은 벼슬에 혹한 마등은 식솔들을 데리고 조조의 비호 아래 들었다. 다만 관서의 군권을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마초를 남겨 휘하 부대를 통솔케 한 것이다. 마등은 조조에게 귀부할 때에도 어느 정도는 억지로 귀부한 듯한 장면이 보이고, 온전히 귀부한 것도 아니고 마초를 남겨 양주에 있는 자기 세력을 이끌게 했다. 이건 조정과 조조 세력에서 인정을 받으면서도 양주의 자기 세력은 유지하고 싶었단 건데, 이게 양립하기 어려운 목표라는 게 문제였다. 마초는 조정에 있는 아버지와 일족이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참 뜻인지, 양주에 있는 마씨 세력을 지켜내는 것이 목적인지 선택해야 했다. 결국은 둘 다 이루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건안 16년(211년) 3월, 조조 휘하에서 손꼽히는 부관들인 [[종요]]와 [[하후연]]이 하동을 거쳐 장로를 토벌하려는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중의 제장들은 이것이 한중 정벌을 핑계 삼아 관서을 압박하기 위한 조치가 아닌가 의심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비단 관서 현지인들만의 것이 아니었는지, 조조의 속관으로 있던 [[고유]](高柔)가 다음과 같은 진언을 올리기도 했다. >대군이 서쪽으로 출병하면 한수와 마초는 자신들을 칠 것이라고 의심하여 반드시 서로를 부추기며 군사를 움직일 것입니다. 마땅히 먼저 삼보三輔(=관중)의 사람들을 불러들여 평안케 해야 합니다. 삼보가 평정되면 한중은 격문 한 장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능히 평정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고유전] 그러나 어째서인지 조조는 고유의 말을 무시했다. 이때 관서 제장들은 겉으로는 귀부했으나 내심은 믿을 수 없었다. 사례교위 종요는 3천 병을 청해 관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겉으로는 장로를 친다고 칭했으나 내심 실제로는 그를 위협하여 인질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위기]] 역시 고유와 같은 의견을 냈다. >서방의 제장들은 모두 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켰으므로 천하에 웅거할 뜻이 없으니 실로 눈 앞의 안락을 구할 뿐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들을 후하게 대우해 작호를 더해주어 그 뜻을 이루게 해 준다면 중대한 사고가 없는 한 변고를 우려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의당 그 후에 도모해야 합니다. 만약 군사를 일으켜 관중으로 들어가 장로를 토벌한다면 장로는 깊은 산에 있어 도로가 통하지 않을 것이고 저들이 필시 의심이 품을 것입니다. 한번 놀라서 동요하게 되면 땅이 험하고 무리들이 강성하니 그 위태로움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순욱이 위기의 의견을 조조에게 보고했다. 조조는 처음에는 그 말을 옳게 여겼으나 종요가 스스로 자신의 임무를 관장해야 한다고 하여 마침내 종요의 의견에 따랐다.[* 위기전 주석 위서] 결국 211년, 종요가 이끄는 부대는 계획에 따라 관을 넘어 서쪽으로 출진했고, 이 시점을 기해 마초가 무리를 통솔하게 된 후 마침내 한수와 굳게 맹세하여 서로 응하고 한수, [[후선]], [[정은]], [[양추]], [[이감]], [[성의]], [[마완]], [[장횡]], [[양흥]] 등 10명의 제장들이 일제히 거병하여 도합 10부로 함께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다. 각 부곡에서 징집된 병사가 1만 명씩은 되어 연합군의 규모는 총 10만 명을 헤아리는 어마어마한 대군이었다.[* 배송지 주 전략] 종요와 하후연이 서쪽으로 기어이 출진하고 나자 그들은 더 이상 군사적 위협을 참지 않겠다는 듯 군사를 연합해 조조가 당황하게 만들 대군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은 [[위수]](渭水) 북단을 단숨에 가로질러 관중 지역 최고의 요새인 장안성을 그대로 통과, 그 동쪽에 있는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군과 대치했다. 이들은 하수, 동수 일대를 점거하고 진영을 벌여 세웠다. 사서에서는 군벌들의 총 병력이 10만이라고 적고 있으며 액면 그대로 믿지 않더라도 6~7만 이상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의와 달리 마초가 장안을 점거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정사 삼국지 내에 없다, 장안 넘어에 있는 동관을 포위했다고 나와 정황상 장안을 점거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은 있으나 직접적으로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라는 식의 기록은 없으며 장안 점거를 한 건 아니고, 장안에서 못 기어나오게 위협만 한 후 우회를 하였다는 것이 대세. 실제 드라마 삼국에서도 이걸 염두해 마초가 장안을 무시하고 동관으로 바로 진격하는 식으로 나온다.] 당초, 한수가 서쪽에서 [[장맹]]을 토벌할 때, [[염행]]에게 옛 영채를 지키도록 하였고, 마초 등과 결탁하여 모반할 때, 마초가 한수를 도독으로 삼았다. 마초는 한수에게 "예전에 사례교위 종요가 저 마초로 하여금 장군을 취하도록 하였으니, 관동인은 다시 믿을 게 못 됩니다. 지금 저 마초는 부친을 버리고 장군을 부친으로 삼으려 하니, 장군께서도 자식을 버리고 마초를 자식으로 삼으십시오."[* 이 발언은 역으로 업에 있는 마등과 일족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이 있다. 마등과의 표면적인 관계를 끊어 자신과 마등은 이제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 일족이 연좌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실제 후대의 [[종회]]가 난을 일으키자 '종회는 책략에 의지하여 뜻 밖의 것을 지키기는 어려우므로 중요한 직책에 위임될 수 없습니다.' 라고 동생 종회와 선을 그어 말한 형 [[종육]]의 자손들은 연좌를 피할 수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서로 친분관계를 요청했다. 염행이 마초와 연합하지 말라고 한수에게 간하였으나 한수는 "지금 제장이 공모하지 않았음에도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는 타고난 수명과도 닮은 것이오."라며 그리고는 동쪽의 화음으로 갔다.[* 삼국지 위서 장기전 주석 위략] 이렇게 한수, 마초가 봉기한 때, 홍농 및 풍익에서는 많은 현읍이 거병하여 그들에게 호응하였다.[* 삼국지 위서 [[두기(삼국지)|두기]]전] 하동은 이들에게 인접한 곳이었으나, 주민 가운데 다른 마음을 품은 자가 없었다. 유웅명은 마초 등이 모반하였을 때, 마초를 따르지 않아, 마초가 그를 격파했고 왕랑전에 따르면 나중에 마초가 반란을 일으켜 가홍을 체포한 다음에, 그를 화음으로 데려가서는 포고문을 만들게 했는데, 가홍은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삼국지 위서 장로전 주석 위략] 이에 조조는 강릉에서 돌아온 뒤 대기 중이던 [[조인]]을 안서장군(安西將軍)에 임명하여 선발대로 출진시키되, 후속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마초와 함부로 교전하지 말고 수비에만 힘쓰라는 엄명을 내렸다. 아울러 자신의 아들이자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으로 있던 [[조비]]로 하여금 업성을 지키게 하고, 분무장군(奮武將軍) [[정욱]]을 보좌역으로 남겼다. 그 외 좌호군(左護軍) [[서선]](徐宣)에게는 군무를, 거부장사(居府長史) [[국연]](國淵)에게는 행정을 맡겼다. 이와 같이 후방의 인사를 마무리한 조조는 가후를 종군 참모로 삼고 [[장합]], [[서황]], [[우금]], [[허저]], [[주령]] 등 쟁쟁한 장수들을 참전시켜 동관으로 출진했다. 이 당시 관서군의 기세는 무서운 수준이었다. 뒷날 [[자치통감]]에 주를 단 호삼성은 >이때 관서 지역의 군대는 (천하에서) 가장 날카롭고 강하였다 고 평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동등한 제장들의 연합으로 형성된 군이라 효율적이고 통일된 지휘 체계가 마련되지 못했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조조는 바로 이러한 장단점에 착안하여 정면 대결을 피하고 적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릴 계책을 세워나갔다. 211년 7월 조조는 본대를 이끌고 동관으로 향했다. 배송지 주 위서의 기록에는 이민족과의 실전으로 단련된 관서병의 강함을 알고 있는 장수들이 "관서의 병사들은 긴 창(모)를 쓰는 데 익숙하니 선봉에 서는 군사들을 잘 선발하지 않으면 당해낼 수 없습니다." 며 관서군이 창술에 빼어난 병사들이 많다는 점을 우려하여 선봉군을 걱정했지만 조조는 이에 대해 "적이 비록 창에 익숙하다지만 장차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찌를 수도 없게 하겠다"며 오히려 호기롭게 받아 넘겼다. 애초에 그는 하루도 끊이지 않은 전투로 단련된 경험 많은 관서군을 상대로 회전을 치를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는 별동대를 파견해 적을 고립무원의 처지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는데, 부장 서황은 그런 조조의 생각과 꼭 들어맞는 대책을 제시했다. 조조가 동관에 도착한 뒤 강을 건너지 못할 것을 두려워해 서황을 불러 물었다. 이에 서황이 말했다. >공의 성대한 군세가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적이 포판(蒲阪)을 수비하지 않으니, 그들이 무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정예병을 빌려주시면 포판진蒲坂津을 건너 병력을 배치한 뒤 그들의 내부를 끊겠습니다. (이렇게 하면) 능히 적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삼국지 위서 서황전] 조조는 그 말을 따랐다. 이후 조조 자신은 관서군과의 대치를 유지하면서 [[서황]]과 [[주령]]에게 4,000명의 병사를 주어 몰래 강을 건너게 했는데 지금의 산서 성 영제현 [[황하]] 입구인 포판을 건너 황하의 서쪽을 점거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관서군은 나름대로 신속히 대응하고자 했지만 서황이 그리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한밤중에 참호와 목책이 미처 완성되지 못했을 때 [[양흥]]이 밤중에 보기 5천여 명을 이끌고 서황에게 기습을 가해왔지만, 서황은 침착하게 대처하여 오히려 양흥을 격퇴시켰다. 이로써 조조군은 북안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제 강물을 거쳐 서쪽으로 나아가면 관서군을 앞뒤에서 협공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조조군의 동향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마초는 즉시 조조가 어떤 주전략을 세우고 있는지를 직감했다. 그는 한수를 찾아가 위수 북안에 방어선을 마련하고 조조군의 도하를 막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조조군은 20일도 되지 않아 군량 부족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는데, 이해할 수 없게도 한수는 마초의 말을 무시해버렸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산양공재기]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그는 되려 조조군의 도하를 방치하자는 황당한 의견을 꺼내놓았다. 한수는 조조군이 강을 건너오면 그대로 군사를 몰아 쓸어버리면 될 것이라면서 전황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총사령이라고 해도 당장 서로의 발언권이 비등한 상황이라 한수나 여타 제장들의 동의 없이는 마초 혼자서 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연하지만 결국 옳게 본 사람은 마초였다. 어떤 경로에서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마초와 한수가 나눈 대화의 내용이 조조에게 입수되었는데, 마초가 이미 자신의 주전략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깨뜨릴 대안을 내놓았음을 알게 된 조조는 아찔함 반 안심 반으로 크게 탄식하며 말했다. >'''마초가 죽지 않는다면 내가 죽어도 묻힐 땅이 없겠구나!'''[* 삼국지 위서 무제기] 새삼 조조로서는 그가 상대하고 있는 관서군이 마초의 직할 부대가 아닌 제장들의 연합군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판이었다. 만약 마초가 명목이 아닌 실질적인 총사령관으로서 관서군 내부에서 다른 제장들보다 우위를 점하고 군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면 전쟁의 향방은 상당히 다르게 흘러갔을 가능성이 높다. 직후 벌어진 교전에서 조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장본인 역시 다름아닌 마초였기 때문이다. 윤 8월, 관서군을 포위하여 압박하는 전략의 마지막 단계가 실행되었다. 일부 병력만 남기고서 조조가 인솔하는 대군이 황하를 도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조는 병력과 물자를 먼저 도하하게 하고 자신은 허저와 그 휘하의 100여 명의 호위병을 곁에 둔 채 후미에 남았다. 그러나 미처 도하 작전이 다 끝나기도 전에 조조군의 움직임을 포착한 마초의 부대가 불시에 용맹하게 돌격하여 들이닥침으로써 그 자리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조조가 동관에서 북쪽으로 강을 건너려 했는데 미처 건너기 전에 마초가 배를 향해 달려와 급박하게 싸웠고, 조조가 장차 황하를 건너려 하여 선두 부대가 막건널 때 마초 등이 돌연 당도하여 날카롭게 돌격했는데 조조는 호상(胡床)에 앉아 일어서지 않았다. [[장합]] 등이 사태가 급박한 것을 보고 함께 조조를 이끌어 배에 타게 했다. 이때 허저전에 따르면 마초는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이끌고 조조군을 추격하여 왔는데 (휘하부대에게 마초가 명령하여)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허저]]는 조조에게 적군이 너무 많이 오고, 지금 병사들은 이미 다 건넜으니 떠나야만 한다고 말하고는 조조를 부축하여 배에 태웠다. 적군은 더욱 빨리 추격하였고 군사들은 배에 오르려는 자들을 죽이고 왼손으로 말 안장을 들어 조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막았다. 사공에게 빨리 노를 저으라 재촉했는데, 설상가상으로 노를 저어야 할 사공이 그만 마초군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에 다급해진 허저는 말안장을 들어 조조를 가리는 방패로 삼고서는 반대쪽 손으로 직접 노를 저어 가까스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진수는 허저전에서 "이날 허저가 없었다면 (조조는) 큰 위태로움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헌데 당시 조조의 도주를 도운 사람은 허저만이 아니었다. 조조군의 교위로 있던 정비(丁斐)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마초군의 추격이 급박한 것을 보고는 그의 관리하에 있던 소와 말을 한꺼번에 들판에 풀어놓았다. 이에 마초군 일부가 추격을 놓아둔 채 가축을 포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어쨌건 이러한 허저의 노력과 정비의 기지로 인해 조조는 무사히 강 반대편에 진지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이에 제장들이 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는 데다 또한 조조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해 모두 황망하고 두려워했는데, 조조를 만나보고는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조조가 크게 웃으며 "오늘 하마터면 좀도둑들에게 곤란을 당할 뻔 했구나!"라고 말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조만전] 하여간 마초는 비록 조조의 전략을 파악하고 또 이를 파훼하기 위해 움직일 수 있었지만, 명목상 총사령관의 직책임에도 연합군이라는 군 체계의 특성과 동료 제장들의 의견차이로 인해 전황이 뒤집어지는 꼴을 속절없이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조조는 이후 황하를 따라 용도(담을 양쪽에 쌓아 만든 통로)를 건설하며 차근차근 남하한다. 마초군은 물러나 위수가 황하로 유입되는 입구(渭口)를 지켰다. 조조가 이미 도하에 성공하여 하서 일대를 장악한 이상 동관 방면에서의 교전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반면 이래저래 전전긍긍하는 적군의 모습을 지켜보게 된 조조는 이제 얼마든지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입장에 섰다. 이에 조조가 속이는 군사(疑兵)를 여럿 두고는, 배에 군사들을 태워 몰래 위수로 들어가 부교를 만들고, 밤중에 군사를 나누어 위수 남쪽에 둔영을 세웠다. 이렇게 관서군과 직접 대적하는 위치에 서는 것은 본래 백병전에 능한 관서군을 상대로 정면 회전은 피한다는 조조의 방침에 비추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이었을 테지만, 당시 조조에게는 참모 누규의 책략에 따라 준비한 대비책이 있었다. 강 남안이 모래밭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누규]]는 당시 날씨가 점차 추워지는 절기에 접어들었음에 착안, 모래로 벽을 쌓은 뒤 물을 뿌려 얼림으로써 임시로 방벽을 구축하는 책략을 내놓았던 것이다.[* 삼국지 위서 누규전] 조조가 탐색전을 겸해 파견했던 소수 부대는 도하하는 족족 마초의 기병대에 의해 격퇴당했지만, 밤을 틈타 일제히 결행한 대규모 도하와 누규의 책략을 이용한 성채 급조에 대해서는 마초는 물론이고 관중 제장들 중 누구도 방비하지 못했다. 물론 마초라고 조조가 이러는 것을 모를 리는 없어서 조조가 이렇게 나온 후에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밤중에 둔영을 공격했으나 조조는 급조한 성채와 복병으로 이를 격파했다. 마침내 조조군이 위수를 도하하자 마초를 비롯한 관서군벌들은 가능한 한 피해를 최소화한 채 근거지인 양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짜내야만 했다. 이에 그들이 어렵사리 꺼내든 패는 다름아닌 화친 요청이었다. 마초군은 한편으로는 자주 싸움을 걸고 한편으로는 연차적으로 땅을 떼어주며 화친할 것을 제안했다. 사실상 전의를 잃지 않은 유일한 제장인 마초는 몇 차례에 걸쳐 싸움을 걸었지만, 조조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응전을 거부했다. 부동의 1인자인 조조와 달리 군벌연합의 수장으로서 서로 이해가 대립되던 군벌들을 무마시키고 조정해야 했던 마초 입장에서는 이도저도 아닌 장기전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관중 제장들은 화평 조약을 맺고 화친을 하자고 합의한 의사를 담은 편지를 조조에게 전했다. 마초 또한 달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관중 제장들의 영토를 보장할 것, 그리고 인질을 교환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러나 조조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사실 조조와 휘하제장, 참모들은 이를 그냥 무시할 작정이었다. 손해를 볼 생각 따위 하지도 않았다. 특히 종군 참모로 동행한 [[가후]]의 책략은 교묘하기 짝이 없었다. 마초와 위수 남쪽에서 싸우는 사이 그는 일단 겉으로는 휴전을 받아들이는 척 넘어가되, 뒤로는 공작을 펼쳐 관중 제장들을 이간시키자고 건의했다. 조조 역시 가후의 책모를 받아들여 "한수와 마초의 동맹을 풀어 버리겠소." 라고 말하였다.[* 삼국지 위서 가후전] 당시 관서군벌을 이끄는 건 한수와 마초였다. 이들 두 사람을 이간시킨다면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제풀에 무너지고 쓰러질 게 뻔했다. 조조는 특히 한수 쪽에 의심의 이목을 집중시키고자 하여 화평 조약을 맺을 때 양측의 수장이 직접 논의 자리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한수와 동석할 자리를 만드는 것에서 이간책을 시작하고자 한 셈이다. 첫 번째 회담 자리에서 조조는 한수에게 유독 친근함을 과시했다. 조조는 한수의 부친과 같은 해에 효렴이 되었고, 또한 한수와 같은 시기의 동년배였다. 이에 말을 마주하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사에 관한 일은 말하지 않고 다만 수도에서 있었던 옛 일만을 얘기하며 손뼉을 치며 환담했다. 대화를 끝낸 뒤 마초 등이 한수에게 물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마초는 의심하여 한수를 추궁했지만, 실상 조조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 영문을 알 수 없기는 한수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째 회담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조조는 5,000명의 철기(鐵騎)대를 이끌고 나와 호인들이 앞뒤로 크게 구경했다. 이때 철기 5천을 늘여 세워 10중의 진을 만드니 광채가 해처럼 빛나 적들이 더욱 놀라고 두려워했다. 조조는 "그대들은 조공을 보고 싶은가? 나는 눈이 네 개 달린 것도 아니고, 입이 두 개 달린 것도 아니다. 그대들과 같은 평범한 사람이되 다만 지모가 많을 뿐이다!"라고 외치며 위풍당당함을 과시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휴전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으니 마초 등 여타 제장들이 점차 한수가 내통 내지는 배신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주석 위서] 한편 [[허저]]전에는 위의 기사와는 다른 양상의 회담이 기록되어 있다. >조조가 한수, 마초 등과 회담을 가질 때 아무도 따르지 못하게 하고 단지 허저 한 사람만 수행하도록 했다. 마초는 자신의 용력에 의지하여 조조를 죽이려 했으나, 평소 허저의 용맹함을 듣고 있었기에 조조를 수행하는 기병이 허저임을 의심하여 물었다. > >조공에게 호후(虎侯)가 있다 하던데, 어디에 있소이까?" > >조조가 고개를 돌려 허저를 가리키자 허저는 눈을 부릅뜨고 마초를 노려보았다. 이에 마초 등은 감히 움직이지 못하고, 곧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마초 역시 꾸미고 있는 바가 있었다. 조조가 관중의 군벌들을 이간시키려 했다면, 마초는 대담하게도 회담 중에 자신의 강력한 용력에 의지해 조조를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삼국지 촉서 마초전에도 조조는 한수, 마초와 더불어 홀로 말을 타고 대화했는데 마초는 자신의 힘이 강함에 의지해 돌진하여 조조를 붙잡으려 은밀히 꾀했으나 조조 좌우의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뜨고 (경계하면서) 노려보았고 이에 마초는 감히 실행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조조가 일부러 한수와의 거짓 회담을 한 전후로 마초까지 참여하는 다른 회담이 몇차례 더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명색히 마초는 관서군벌을 이끄는 위치였으니만큼 조조가 마초를 무작정 배제하기는 어려웠을터이다. 또, 무작정 마초를 배제한다면 오히려 마초가 조조의 획책을 의심했을 수도 있는 노릇이고 이렇게 하는 편이 한수가 조조와 혼자 대화할때 의심하기 만들기도 좋았을 것이다.[* 일단 [[자치통감]]에서는 이 기록을 배제하였다. 자치통감의 국내 번역자인 권중달 교수는 원저자 [[사마광]]이 이를 사서에 수록하지 않은 것을 들어 허저전의 내용이 조작일 것임을 의심하고 있는데 다만 이 부분은 앞선 기록들에서 허저가 호위하여 마초가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강조하기에 시도 자체는 사실이지만 내용을 허저의 용맹을 강조하기 위해 부풀린 기록이라는 의견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처음부터 회담을 [[이간계]]의 씨앗으로 뿌리려 의도한 조조로서는 만족스러운 전개였다. 뒷날, 조조가 또 한수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여러 곳의 글자를 첨삭해 마치 한수가 고친 것처럼 보이게 하니, 이로 인해 마초 등은 결정적으로 한수가 조조와 내통 중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초와 한수를 이간시키니 다시 서로 시기하고 의심하게 되었고 군이 대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삼국지 위서 가후전] 다수의 제장들에 의해 운영되는 관서군의 지휘 체계상 이러한 의심은 연합 자체를 와해시킬 수 있는 치명타였음에 틀림없다. 이에 조조가 날짜를 정해 어울려 싸웠다. 먼저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용맹스러운 기병을 풀어 양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다. 조조는 관중제장들에게 회전을 건 것인데 이런 회전에서는 기병의 수와 질이 싸움의 승패를 결정하는 법이다. 조조는 최소 5천명의 철갑을 입은 정예기병을 가지고 있었고 호인들 앞에서 보여주기만 한 철기가 이 정도니 그 외 기병들은 더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호인들이 이를 두려워했던 점을 봤을때 아무리 기병 전력을 양성하기 편한 관중의 이민족들이라도 두려워할 만큼의 기병의 질과 양을 조조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주동자격인 한수, 마초 등은 양주로 도주하고 양추는 안정으로 달아나니 관중이 평정되었다. 그러나 마초와의 오랜 싸움으로 조조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종요의 군사가 처음 진격한 이래로 관서가 그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의심해 들고 일어나 조조가 친히 정벌한 뒤에야 겨우 이를 평정할 수 있었고 전사자도 만 명을 헤아릴 정도였다.[* 삼국지 위서 위기전 주석 위서] 전사자만 만 명 단위였으니 포로나 부상자들은 헤아릴수 없었을 것이다. 조조는 관중 제장들이 산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대신 한꺼번에 차례대로 모여준 덕에 일거에 적군을 섬멸할 수 있었다는 말로 전장을 마무리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결과적으로 조조의 말이 당시 전황에 부합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이 발언은 마초가 들었다면 매우 고까웠을 발언이었을 텐데, 당시 조조와 싸운 상대가 조조, 원소, 주유, 유비 같은 출중한 군략가의 지휘 아래 완벽히 일사분란하게 통제되는 정예군이 아니라,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한 명목상의 지휘관이 마초인 군벌 연합 집단이었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제장들은 지휘관으로서의 역량이 현저히 떨어졌고, 오직 마초만이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갖추고 있었으나 바로 그 한수 등 동료 장수들에 의해 자신의 뜻대로 전략을 펼쳐볼 수 없었다. [[삼국지연의]]를 비롯 후대의 묘사에서는 마초가 허저, 장비 등의 맹장들과 막상막하로 무용을 펼치되 지략은 휘하장수 [[방덕]]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마초는 오히려 개인의 무용도 무용이지만 그보다 야전에서의 지휘능력과 상황 판단력에 더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조조조차도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는 기록과 도하 작전 직전에 조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 책략을 깨뜨리기 위해 치렀던 일전에서는 확실히 그의 비범한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그는 관서군을 완벽하게 장악하는 게 불가했고 근본적으로는 각기 동등한 권한만을 갖춘 여러 제장들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그와 조조의 결정적인 입장 차이였고, 동시에 승패가 극명하게 나뉜 근본적인 원인이기도 했다. [[자치통감]]에 음주를 단 호삼성은 관서군을 들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부대라고 평가했으나 동시에 이 마디를 덧붙였는데, 그 내용이야 말로 관서군벌들이 패배한 근본 원인이라고 할 만하다. 그 말은 다음과 같다. >(관서군이) 조조에게 격파당한 것은, 법제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농서에서 이민족들과 주민들의 강력한 지지와 인심을 얻고 있었던 마초를 제외한 관중의 제장들은 전부가 재기하지 못하고 몰락했다. [[양추]]는 동관에서 서쪽으로 달아나 안정(安定)에 숨었으나 이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쫓아온 조조군에게 투항했고, 남전(藍田)으로 간 [[양흥]]은 한중 정벌을 중지하고 돌아온 하후연에게 토벌당했다. 그는 어찌어찌 부성(鄜城)까지는 달아났지만 결국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 외 한수나 마초를 따라 멀리 양주까지 달아난 인물이 몇몇 있기는 했으나 그들도 거의 무사하지는 못했다. 특히 마초와 더불어 관서군벌의 거두로 손꼽히던 한수는 금성으로 달아났는데 몇 년 지나지 않아 하후연을 상대로 마초와 산발적 연합하던 시절 버릇을 못 버리고 똑같은 짓을 하다가 대차게 깨지고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각, 곽사전] 그나마 [[장로(삼국지)|장로]]에게 도망친 인물들은 나중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할 때 같이 항복하면서 지위를 회복할 수 있었다. 211년 10월, 마초는 달아나 여러 융족들에 의지하려 했고 마초를 쫒아 북상해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 조조는 이를 추격해 안정에 이르렀으나 때마침 조조 역시 북방에 일이 생겨 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때 이 지역의 속관인 [[양부(삼국지)|양부]]가 조조를 설득하며 '마초는 [[한신]], [[영포]]의 용맹을 갖추고 [[강족]], 호족의 마음을 심히 얻고 있으니 만약 대군이 돌아가며 이를 엄히 방비하지 않는다면 농상의 여러 군들은 국가의 소유가 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렸다, 물론 조조는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빠른 시간에 군대를 귀환시켰으므로 수비는 주도면밀하지 못했다.[* 삼국지 위서 양부전] 이런 기록을 보면 실제로 조조 또한 이번 전쟁에서 자신을 고전케 한 인물이 오직 마초뿐이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마초가 여타 관중 제장들과는 달리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만만히 볼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양부의 건의가 근거 없는 우려가 아니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조조는 양부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는 있으면서도 그의 건의를 완전히 수용하지는 못했다. 당장 그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후방에서 [[전은]](田銀)과 [[소백]](蘇伯)이라는 자들이 주도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또한 멀리 강동의 [[손권]]은 유수(濡須) 지역에 보루를 건설하여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노골적으로 북진을 계획하고 있었다. 덧붙여서 [[유비|오랜 숙적]]도 힘을 기르고 있으니 이미 대패해 달아난 관서군의 동향보다는 동쪽의 일이 더 급했다. 조조는 [[하후연]]을 남겨 마초의 잔존세력을 토벌하게 했다.[*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 이렇게 조조 휘하 최고의 숙장 중 한 사람인 하후연이 장안에 남아 주둔하고, 서황과 장합 같은 일급 장수들이 하후연의 부장이 되어 역시 서부 전선에 주둔하게 된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아무런 방지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부전에서 이러한 조치들이 그리 주도면밀한 것이 아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조가 마초에 대해 설마 다시 그가 재기해 근심거리가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하고 방심한 것 또한 사실인 듯 싶다. 다른 관중 제장들은 몰락을 면치 못했으니까. '''그러나 마초는 이때부터 몰락한 그들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