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초 (문단 편집) ==== 기성 전투 ==== 이렇게 도주에 성공한 마초는 한양(천수) 상규(上邽)를 점거하면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비록 빈털털이가 되어 돌아온 양주였지만 어찌 됐건 그의 명망은 아직 주효했던 듯하다. 상규현의 현령 [[염온]](閻溫)은 본래 조조 측 인사로서 마초를 받아줄 의향이 전혀 없었지만, 현내 사람들 중 절대다수가 오히려 현령의 뜻을 거스르고 마초에게 힘을 보태고자 했으므로 그는 공직을 포기한 채 달아나야 했다. 아직도 마초의 영향력이 죽지 않았음을 확인한 염온은 장차 관중 지역이 다시금 전란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함께 기성(冀城)으로 향했다.[* 삼국지 위서 염온전] 한편 12월 중앙으로 돌아온 조조는 212년 5월, 마초의 아버지 [[마등]]의 삼족을 멸했으며 한수의 자손들도 죽였다. 아버지와 두 동생을 비롯한 마초의 일족 200여 명은 모두 이때 죽어 마초에겐 사촌아우 [[마대]]와 아내인 [[양씨(삼국지)|양씨]], 아들들과 몇몇 일족만 남게 된다. 조조는 자신의 군사활동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자고 한 자의 가속을 죽이고 그렇지 않은 자들의 가속은 살려두는 이간책을 두어 본보기로 삼았다. 대표적인 예가 [[염행]]으로 조조는 염행이 한수를 말린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수의 자손들만 죽이고 염행에게는 "그대의 부모님은 감옥에 봉양할 공간도 없고 관청에서도 이제 못 모시는데 이제 어찌되려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니 이런 조조의 이간책에 염행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를 안 한수를 염행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사위로 삼지만 조조가 염행을 의심하자 더욱 초조해진 염행은 결국 반기를 들어 밤중에 한수를 급습하지만, 패배하자 일가를 이끌고 조조에게 의탁하고 만다. 이렇듯 조조 쪽에 우호적인 장수였기 때문에 그의 부모들은 조조에게 붙잡힌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마초와 한수 등은 이들의 수괴였고 조조는 아직 토벌되지도 않은 이런 자들에게는 전쟁 중에 그들이 먼저 화해의 시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선 그냥 무시하거나 이간계를 사용했고 이들을 격파한 이후에도 굳이 염행의 사례처럼 회유책을 쓰지도 않고 마등, 한수 일족을 그냥 몰살시켰다, 조조는 이들의 가솔을 죽여 자신에게 대항할 마음을 품은 자와 그렇지 않은 소극적인 자의 차이를 분명히 했다. 이로 인해 조조에게 더욱 이를 갈게 된 마초는 필사적으로 재기를 시도하여 관중 제장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다시 세력을 정비하는 데 성공했다. 막강한 군벌들이 대부분 죽거나 투항했지만 호족들과 이민족들까지 조조에게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거듭된 전란으로 피폐해진 서북지역의 민심은 그곳을 통제하던 군벌들이 사라지자 극히 유동적으로 변했고 조조의 영토라기보단 분쟁지역에 가까웠으며 오히려 이 지역 민심을 장악한 마초의 땅에 가까웠다. 그 예로 농상의 군현들은 거의 모두 그에게 호응했다. 이후 마초는 다시 관중 공략을 시도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이뤄진 유비의 익주 공략과 마초의 관중 공략은 전혀 별개의 전쟁이나, 결과에 이르러 후자가 전자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마초는 융족(강, 저족)의 우두머리들을 인솔하고 농상의 군현을 공격하였다.[* [[강유]]의 아버지 강경이 이때 강족의 봉기를 막다가 전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마초의 공격 말고도 강족과 저족을 수시로 이 지역에서 봉기를 일으켜왔기 때문에 시점을 확언할 수는 없다.] 이렇게 조조에게 붙은 고을들을 공격해 평정했고 마초가 강족과 호족의 군대를 규합하자 그 위명에 농서의 거의 모든 고을들이 바람에 쓸리듯 마초에게 호응해 왔다. 현지의 조조군이 뭘 어쩔 틈도 없이 양주의 거의 전 지역이 마초의 발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조조가 임명한 양주자사 [[위강]](韋康)과 앞서 마초의 재기를 우려하며 조조의 주의를 환기시켰던 참군 양부가 지키는 오직 한 곳, 기성만은 주와 군의 관리들을 끼고 고수하며 성문을 닫고 마초에게 맞섰다. 마초는 농우의 병사들을 모두 겸병하였으므로, 심지어는 마초와 별다른 교류가 없던 [[장로(삼국지)|장로]]조차 또 대장 [[양앙]]을 파견하여 그를 도왔다. 모두 만여 명이 성을 공격했다. 양부는 나라의 사대부와 종족 자제 중 전쟁에 참가한 천여 명을 인솔하고, 종제 양악에게 성벽 위에서 초승달 모양의 진영을 만들도록 하고 마초와 전투를 했다. 정월부터 8월에 이르기까지 저항하며 지켰고 거의 8개월을 버텨냈다. 그러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삼국지 위서 양부전] 그들의 항전이 그리 오래갈 수는 없었다. 상규에서 마초를 피해 기성으로 왔던 염온은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가 장안성에 주둔하고 있는 [[하후연]]에게 지원을 요청하려 하였다. 적의 포위는 몇 겹에 이르렀으나, 염온은 밤중에 물 속에 숨어 탈출하였다. 다음 날, 마초군은 염온이 포위를 벗어난 흔적을 발견하고, 사람을 풀어 그를 쫓게 하여, 현친현의 경계에서 염온을 발견하여 이를 붙잡아 마초에게로 끌고 돌아왔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기성을 빠져나가려 했던 것인지 짐작한 마초는 마초는 그 포승을 풀어주었고 다음과 같이 그를 회유했다. >이제 승패의 향방이 보이겠지. 족하는 고립된 성의 구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가 우리 손에 붙잡혔는데, 어떠한가. 혹여 내 말에 따르고자 한다면 곧 성에 돌아가 올 원군이 없다고 말하도록 하라. 이리 행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대를 죽일 것이다 마초는 이렇게 그에게 구원병이 오지 않으리라고 성 안에 통보하라 지시했다. 이에 염온은 위협에 굴복한 듯 순순히 성 앞으로 가서 고할 말이 있다 외쳤으나, 그 뒤에 나온 말은 마초를 격분케 만들었다. >대군이 3일 안에 도달할 것이니 모두들 힘을 내시오! 성중에서는 이를 보고 모두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외쳤다. 절망을 사기로 바꾼 기성의 군사는 기세등등하게 마초군과 맞섰다. 딱히 승패의 결과가 바뀔 만큼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은 아니라 하나, 어쨌든 마초가 단숨에 기성을 점령하기란 어렵게 됐다. 마초는 노하여 그를 책망하면서 "족하는 목숨을 어찌 이리 가벼이 여기는 것인가!"라고 화를 냈으나 사실 마초는 협박했던 것과는 달리 당장 그를 죽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몇 차례에 걸쳐 염온을 회유하여 자신의 부하로 만들고자 했다. 염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마초는 장기간 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치 못하였기에 그를 회유하여 뜻을 바꿀 수 있을까 기대하였다. 이에 또 다시 염온에게 성중의 연고자 가운데, 자신에게 동조하려 하는 자가 있는지 없는지 물었으나 염온은 또한 답하지 않았다. 결국 엄히 그를 책하였으나, 염온은 "장부가 군주께 사관함에 이르러서는 죽어도 두 마음을 갖지 않는다 하오. 헌데 경은 장자에게 의롭지 못한 말을 하게끔 하려는 구려. 내 어찌 삶을 탐하는 자이겠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염온이 끝까지 마초를 따를 기색을 보이지 않자 이에 이르러 마초도 어쩔 수 없었는지 결국 마초는 그를 죽였다. 미관말직에 머물렀으되 의기만은 높았던 한 의사(義士)의 숙연한 최후였다.[* 삼국지 위서 염온전] 당연한 일이겠지만, 염온의 발언과 죽음이 기성의 전황을 크게 뒤바꾼 것은 또 아니었다. 3일의 시간이란 실상 염온이 어떻게든 기성의 군민을 분발시키기 위해 내놓은 거짓말에 불과했고, 하후연이 마초가 전격전을 벌이며 관중 지역의 수복을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의 일이었던 것이다. 마초의 공격이 드높아지자 성안의 사람들은 배고픔에 시달렸다, 자사 [[위강]]은 원래 인자한 사람이었는데, 관리들과 백성들이 상하는 것이 두려워 마초와 화해하려 하였다. 건안(196년~220년) 연간에, 참군사가 된 [[조앙]]이 기성에 살고 있었는데 조앙은 그 의견에 반대하였다. 집에 돌아와 부인인 왕이에게도 말했는데 [[왕이(삼국지)|왕이]]는 스스로 궁농수(弓籠手)를 몸에 걸쳐 활을 쏘아 마초군에 대항해 싸웠고 남편 조앙 옆에서 싸우면서 귀걸이나 반지들을 조앙의 병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던 여장부였으므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에게는 그를 충고하는 신하가 있어, 신하는 위급할 때에 독단이 인정되고 있습니다. 독단이 꼭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후연의 구원이 근처까지 와있지 않다고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병사들을 독려하고 높은 공을 위하여 같이 노력해야 합니다. 모두 절개를 완수하여 죽읍시다. 항복은 안 됩니다. 조앙이 돌아가 위강을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이미 [[위강]]은 마초와의 화해를 도모하고 있었다.[*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 이미 자사와 태수는 낯빛을 잃었고, 마초에게 항복하자고 하는 이가 있기 시작했다. [[양부(삼국지)|양부]]는 눈물을 흘리며 "저 양부 등은 부모 형제를 이끌고 대의로써 서로 면려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두 마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항복은 성공할 공업을 버리고 의롭지 못한 이름 속으로 빠지는 것입니다. 저 양부는 죽음으로써 이 성을 지킬 것입니다."라며 말하며 통곡을 했다. 결국 자사, 태수는 사람을 파견하여 화의를 요청하고, 성문을 열고 마초를 맞이하였다. 마초는 성 안으로 들어왔으며, 기성에서 양악을 구금하고, 양앙을 시켜 자사, 태수를 죽이도록 했다. 양부는 마초의 호의로 살아남았는데 관청을 차렸으니 군무를 살피고 사무를 관장할 행정관이 필요해 남겨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조가 임명한 다른 지방관을 죽일때 극렬 친조조파 속관인 양부를 죽이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삼국지 위서 양부전] 어쨌거나 213년,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다시 일어나 기성을 제외한 농상의 군현들을 모두 손에 넣었다. 이후 공성전으로 기성을 장악한 마초는 정서장군(征西將軍) 병주목(幷州牧) 독양주군사(督涼州軍事)를 자칭하며 자신의 재기를 요란하게 선전했다. 그리고 이제 조조 휘하에서도 손꼽히는 명장인 하후연과 대결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후연은 본래 조조 휘하의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신속한 용병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 때문에 [[관도대전]] 당시에는 최전선에 대한 보급 업무를 총괄했고, 하북 원정 때는 '엿새에 천 리를 간다'는 명성이 돌 정도로 화려한 용병술을 구사하기도 했다. 강동 정벌에 나선 조조가 굳이 그에게 장안성을 맡긴 이유 또한 하후연이라면 충분히 관중의 소요를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신임에서 기인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상대해야 할 적수는 저족 반란군이나 여타 관중 제장의 잔당이 아닌 마초였다. 하후연과 마찬가지로 기병대 운용에 능숙하고 속전속결형 전법을 선호하는 무장인 그는 앉아서 공격을 기다릴 생각 따위 전혀 없었다. 장안에 있던 하후연은 조조의 재가를 받느라 제때 원군을 대지 못했고 원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이었다. 마초는 농성전 대신 야전을 택했고 기성 밖 200리 지점에서 '''조조군에서도 손꼽히는 명장 하후연의 군세를 격파했다.''' 자세한 전황을 말하면 마초가 양주자사 [[위강]]을 양주 천수군 기현에서 포위하자 하후연이 위강을 구원하려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위강이 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마초는 기성에서 2백여 리 떨어진 곳까지 신속하게 진격하여 하후연과 맞서 싸웠는데 마초는 단숨에 요격전을 벌여 자신의 방식대로 전투를 끌고 갔다. 아직 기성이 함락당했음을 알지 못했던 하후연에게 이것은 불의의 기습이나 다름없었다. 뛰어난 장수답게 일격에 궤멸당하는 것을 피하고 교전 태세에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지만, 군이 불리했고 전장의 주도권은 계속 마초에게 있었다. 결국 마초에게 질질 끌려다니던 하후연은 [[견저]]가 모반하고 저족이 군사를 이끌고 마초에게 협력하려 한다는 급보를 접하자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다. 하후연의 퇴각으로 한동안 농서 지역에서 마초를 견제할 만한 군세는 사라지게 된다.[*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 기성을 비롯한 관중 일대의 군현이 마초의 손에 넘어가고, 이를 저지하러 온 하후연까지 패퇴당한 이상 양주는 이제 온전히 마초의 영토였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형태로 터진 반격은 이 일대의 전황을 급격하게 뒤바꿔 놓았다.''' [[왕이]]는 남편에게 죽은 상관인 위강을 위해 복수하도록 권했다. 마초는 조앙의 적자 [[조월]]을 인질로 취하였는데 마초는 조앙을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고 싶었지만 아직 크게 신뢰하지 못하였다. 마초가 양주 관리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데. 왕이는 자신의 절개가 높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초대한 마초의 아내 [[양씨(삼국지)|양씨]]의 환심을 사 이를 이용해 마침내 조앙도 마초의 신임을 받게 했다. 왕이는 양씨를 설득하여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려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나라가 안정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난리를 평정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있습니다. 양주의 군사와 말이야 말로 중원의 나라와 싸우는 데 딱입니다. 마초의 처 양씨는 깊게 감동하였으며, 양씨는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중요한 일에 대해서 왕이를 불러 상의하고 결정하곤 했다. 조앙이 마초의 신뢰를 받게 된 것과 모두 공을 세우고 화를 면한 것은 왕이의 노력 때문이었다.[*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 한편 살아남았던 양부는 마음속으로 마초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적합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다 양부의 아내가 갑작스럽게 죽어 장례를 치러야 할 상황이 됐다. 이를 빌미로 기성을 잠시 떠날 수 있게 된 양부는 역성(歷城)을 방문하여 [[강서]](姜敍)를 만났다. 강서는 양부의 고종사촌 형으로 역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양부는 어렸을 때 강서의 집에서 성장하였는데, 강서의 어머니와 강서를 만났을 때 이전에 기성에서 발생한 일을 말하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리고 매우 비통해 했다. 강서가 왜 우는지 묻자 양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성을 지켰지만 완전하게 할 수 없었고, 주인이 죽었는데 함께 죽을 수 없었으니 또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서 숨을 쉬며 살겠습니까! 마초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군주를 배반했으며 주의 장수들을 죽였습니다. 어찌 저 양부 혼자만이 슬퍼하며 책임을 느끼겠습니까? 한 주의 사대부들은 전부 치욕을 받았습니다. 당신은 병권을 장악하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지만, 적을 토벌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은 조돈이 사관들에게 반역자를 죽인 것이 아닌 주군을 죽인 것으로 쓰인 까닭입니다. 마초는 강대하지만 신의가 없고, 대부분 모순되는 것이 많아 무찌르기가 쉽습니다. 이 강서라는 인물은 단순한 친인척이 아니라 역성을 지키고 있던 장군으로, 어느 정도 병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양부는 그것을 밑천 삼아 마초와 대항하고자 한 것이다. 본래 강서는 늙은 어머니의 안전 때문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그 어머니가 양부에게 감동해 자신의 생사를 신경쓰지 말라고 강권하자 이에 마음을 다잡고 마초를 공격할 채비를 했다. 강서의 동향 사람들인 [[조앙]], [[윤봉]](尹奉) 및 기성에서 기다리고 있는 양부의 동료 [[양관]](梁寬) 등이 합류하면서 이와 동시에 외부의 고향 사람 [[강은]], [[요경]], 공신, 무도 사람 이준, 왕령 등과 모의하는 한편 종제 양모를 기성으로 보내 양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거기다가 안정현의 양관, 남안의 조구, 방공과도 손을 잡아 계획은 점차 구체적으로 발전되었다.[* 삼국지 위서 양부전] 이 가운데 조앙은 아들 조월(趙月)이 마초의 군영에 있다는 이유로 합류를 주저했지만, 그의 아내 왕이가 '''"군부의 치욕을 설욕할 때는 자신의 목숨조차 내놓아야 하거늘 하물며 아들 하나쯤이야 어떻단 말인가"'''라는 무서운 말로 설득한 탓에 조앙은 그대 말이 옳다고 하고 결국 계획을 밀어붙이게 되었다.[*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 훗날이야 어찌 됐건, 양부와 강서 등의 계획은 이랬다. 우선 계획의 주도자인 두 사람이 각기 병력을 이끌고 마초의 세력권을 공격한다. 그러면 마초는 필시 직접 그들을 격퇴하러 출진할 텐데, 그 사이 기성에 있는 동료 양관이 성 안의 마초 세력을 일소하고 기성을 장악하여 마초의 근거지를 없애버린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퇴각했던 하후연이 다시 돌아와 그들을 지원한다면 군사력으로도 밀릴 게 없다. 이상의 결론을 내린 양부 등은 즉각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벌어진 전투는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마초는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직접 군대를 인솔하여 출전하였다. 이렇게 양부, 강서가 노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마초가 출군해 이를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는데,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아 버리자 마초가 들어갈 수 없게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기성은 양관에 의해 점거되었으며 조구와 양관은 양악을 풀어주었고, 마침내 조앙, 양관 등은 성 안에 머물고 있던 '''마초의 아내와 남은 일가붙이를 모조리 살해했다.''' 살아남은 건 거기 없던것으로 추정되는 사촌동생 마대나 첩실일가 정도. 그러나 전투 자체는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양부가 비록 직접 미끼를 자청하여 마초와 교전을 벌였지만, 본래 장수가 아닌 그에게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양부의 형제 일곱 명이 전사했고, 양부 본인 또한 다섯 군데나 부상을 입었다. 사실상 지휘선이 완전히 붕괴된 그 상황에서 되려 마초가 물러난 것은 오직 기성이 점거당했다는 급보 때문이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마초는 전쟁에서는 패한 것이었다. 결국 마초는 가족이 죽은 복수라도 할 목적이었는지 강서의 근거지 역성을 습격하여 강서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강서의 모친은 그에게 욕을 퍼부었다. >너는 부친을 배반한 역적 놈이고, 군주를 살해한 흉악한 적이다. 천지가 어찌 너를 오래 살려두겠느냐? 네가 일찍 죽지 않는다면, 무슨 면목으로 감히 사람들을 보겠느냐! 마초는 격노하여 강서의 모친을 죽였다. 결국 기성전투는 서로가 서로의 일가를 멸한 끔찍한 전쟁으로 변한것이다. 이렇게 본거지와 일가를 잃고 마초는 진퇴가 낭패스럽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자신의 뒤를 쫓아올 하후연을 걱정해야 했다. 이제 더 이상 관서에는 발을 붙일 수 없다 여긴 그는 멀리 한중으로 달아났다. 앞서 군사를 지원했던 [[장로(삼국지)|장로]]의 호의에 기대를 걸고 몸을 의탁하러 간 것이다. 해를 지나 건안 19년(214년) 봄, 장로에게 달아났던 마초는 포기하지도 않고 끈질기게 양주의 재공략을 시도했다. 그는 한중의 군사를 빌려 기산(祁山)을 공격했는데, 마초는 한양에서 다시 [[강족]], 호인에 의지해 군사를 일으키자 저왕 [[천만]]이 모반하고 마초에 호응해 흥국에 주둔했다. 하후연을 시켜 이를 토벌하게 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 한편 마초의 원수인 왕이는 남편과 함께 기산에서 마초와 30일간 맞서 싸웠다. 기산이 습격당하고 나서 기산의 수비에 조앙이 낸 아홉 가지의 기묘한 꾀에는 전부 왕이의 생각이 들어 있었다.[* 양부전 주석 황보밀 열녀전 왕이] 또, 당시까지 현지를 지키고 있던 장수 강서는 급히 하후연에게 연락을 보내 상황을 알렸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함부로 출진하는 것보다는 우선 업군에 있는 여러 장수들이 의논하기를 조조의 절도(節度)를 기다려 행동에 나서자고 주장했지만, 앞서 간발의 차이로 기성을 빼앗긴 탓에 마초에게 패배한 경험을 잊지 않은 하후연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보고를 받은 지금 당장 출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공께서 업에 계시니 왕복하여 4,000리 거리요. 보고가 이를 무렵이면 강서 등은 반드시 패할 터인데, 이것이 급한 상황을 구할 만한 계책은 못 되는 것이잖소?[* 삼국지 위서 하후연전] 마초의 요격에 호되게 당했던 만큼 이번만은 마초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투였다. 다만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는지, 부장으로 있던 [[장합]]에게 보병과 기병 5천을 주어 선두에 서서 진창의 좁은 길을 따라 선봉으로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자신은 후방에 남아 군량을 감독하며 잠시 전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만약 장합이 마초에게 패하거나 밀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는 하후연이 지원군이 되어 뒤따라 출진할 태세였다. 그러나 전쟁은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장합이 위수 가에 도착하자 마초가 강족과 저족 수천 명을 이끌고 장합에 맞섰으나 곧 싸우기도 전에 마초가 퇴각하니 장합은 진군하여 마초군의 무기를 거두었다. 하후연이 도착했을 때는 여러 현들이 이미 다 항복한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는 하후연의 말대로 보고가 조조에게 들어아고, 또 그에 대한 지시가 장안으로 내려올 때까지는 시간이 있으리라 예상했던 듯 싶다. 그러나 작년의 전쟁을 거울삼은 하후연이 신속한 대처로 나오자 후퇴한 것이다. 이제 마초가 [[한중]]에서 더 나올 생각이 없는 듯 보이자 양주는 하후연의 독무대가 되었다. 하후연은 이후 이민족과 연합한 한수를 격파하고 양주를 종횡무진 평정하며 명장으로서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어쨌거나 이렇게 구원군이 오고 기산의 포위가 풀리자, 마초는 더 이상의 인질가지가 없어진 조앙과 왕이의 자식 조월을 죽이고 후퇴했다. 한편으로 이 부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상식적으로 가족에게 친근하게 접근해 마치 친구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눈앞에서 배신해 전부 죽여버린 원수 중의 원수인 여자이며, 아예 아들이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는 냉혹한 상대의 자식을 인질로 잡고 있으면서도 '''마초는 인질을 바로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원수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는 기성에서 배신당해 일가족이 몰살당한 일로 역성에 가서 강서의 어머니도 비슷하게 할 수 있었지만 마초를 패륜아로 욕하자 죽였다, 그런데 마초는 그보다 더한 배신자인 조왕과 왕이의 자식을 한중까지 끌고갔다. 상식적으로 조앙과 왕이가 자식을 버렸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상태에서 말이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시점이라면 '''조월의 인질로서의 이용가치는 여기서 이미 끝났는데도 마초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이 부분은 마초의 의외의 인내심이나 참을성 같은 인간성이 보인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기산에서 끝까지 조월의 인질로서의 가치를 파악한 후에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고선 죽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본다면 이 행위는 '''조앙과 왕이는 지금이라도 기산을 버리고 나한테 항복해라, 너희에 대해서, 너의 아들의 목숨은 아직 나에게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다.''' 마초의 메시지가 되어버린다. 단순히 화풀이였다면 이미 역성에서 강서의 어머니 상대로 그랬듯이 진작에 화풀이로 죽여버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기산에서 싸우는 중에 얼마든지 전투 중 처죽여서 왕이 상대로 화풀이로 쓸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그런 선택을 했다. 마초가 기산을 공격하는 건 단순 화풀이가 아닌 기산을 함락시켜 양주의 회복을 꾀하는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마초는 분명 조월이 왕이의 마음을 약하게 하여 기산을 항복시킬수 있다고 믿고 그런 방책을 썼다는 소리이다.[* 한 가지 가설을 내세울 수는 있다. 마초는 아내 양씨를 통해 조앙과 왕이를 신뢰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그들에 대해서도 '기성에서 다른 사람의 반란에 휘말린 것뿐이지 그 자신들이 마초와 그 가족을 결코 저버릴 생각은 없었던 사람들'이라고 끝까지 그들을 믿었다면, 그리고 마지막까지 믿었다가 결국엔 배신당한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마초의 이런 행동이 아예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서는 간략하게 마초가 마지막에서야 조월을 죽였다는 기록만 남겼을 뿐, 그가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건 하나의 추즉이자 가설로만 봐야 할 것이다.]결국 그는 왕이가 끝까지 그와 싸워 조월의 목숨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다는 식으로 나오니 그제서야 그를 죽였다.[* 비슷한 예로 마초는 염온이 끝까지 마초에게 저항하여 기성공성전을 꼬아놓은 원흉임에도 몇 번 살려보아 자신의 부하로 쓰려고 했고 그게 되지 않자 결국엔 죽였다.] 패륜아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초에게 전해지는 이런 에피소드는 대개 이런 식이라 과연 진짜 마초라는 인간이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 수 없게 만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