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카오/역사 (문단 편집) == [[마카오 반환|중국 반환]] == 포르투갈 군부 정권이 [[1975년]] [[카네이션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긴 식민 전쟁에 지친 포르투갈은 모든 식민지들을 빠르게 포기하려고 했고 마카오도 예외는 아니었다. 포르투갈은 이 시기에 아예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중화민국과는 단교했고, 중화민국 대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밀착하면서 마카오 반환을 제안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먼저 마카오 반환을 제안해도 중국 정부는 반환에 미온적이었다. 중국이 1970년대 마카오 반환에 미온적이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중국 입장에서는 마카오보다 홍콩을 돌려받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1970년대]] 당시는 아직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참고로 [[영국]], [[프랑스]], [[노르웨이]] 등의 국가는 이미 [[1950년대]]~[[1960년대]]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중화민국과 단교하였다. 영국은 홍콩 영유권 문제 때문에 그랬고 프랑스와 노르웨이는 공산권과도 친분을 맺어서 [[소련]]과도 밀접하게 외교를 전개했다.]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대만]]의 [[중화민국]]을 유일한 정통 중국으로 승인하던 상황이었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죽의 장막]] 건너로 얼마 없는 서방과의 협상창구 마카오를 일단 놔두고 활용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영국이 홍콩 전체의 반환을 거부하고 [[신계(홍콩)|신계]] 외곽만 반환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래저래 협상이 길어졌고, 중국은 이 문제에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는 홍콩이 당연히 더 중요했다. 두번째는 카네이션 혁명 이후부터 마카오 식민 정부가 이미 중국 공산당에 유화적인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마카오는 1975년 이후 마카오 내 중국계를 정치 요직에 기용하는 등 사실상 반환되었다고 할 정도로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고 중국의 영향력이 점차 강해졌다.[* 비교하자면 영국령 홍콩은 1967년 중국의 개입으로 발생한 [[67폭동]]도 자체 경찰력으로 진압했고, 이에 중국이 반발했지만 영국의 통제를 약화시킬 수는 없었다. 이후 1980년대 영국이 강대해진 중국을 의식해 홍콩을 반환하지만, 1992년까지 장관급에 중국계를 기용하지 않을 정도로 영국이 통제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 그 뒤로는 장관급에 중국계를 기용했지만 이것은 반환을 대비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은 이에 재빨리 마카오의 재벌인 [[스탠리 호]]와 접촉, 그를 구워삶아서 친중 인사로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이후 스탠리 호 그룹이 카지노 운영을 독점하자 여기서 재미를 좀 본다. 마카오의 중국화는 이렇게 뿌리가 깊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화의 과정에서 마카오인들도 중국을 모국/형제국가로 인식하게 된다.[* 영국이 마지막 순간까지 통제를 놓지 않았던 홍콩의 경우 반환 후에도 일국 양제와 민주주의를 두고 우산 혁명이나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등의 반정부 시위를 벌여왔지만, 마카오인들은 대체로 홍콩인들의 시위에 대해 공감하지 못한다. 이는 홍콩에 건너온 마카오인들도 똑같아서 [[2019년]]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당시 마카오 출신들은 시위를 반대했고 질서 유지를 강조했다. 홍콩에 국가보안법이 [[2020년]] 발효되었으나 마카오는 진작 발효되어 [[2009년]]에 국가보안법 및 반국가분열법 마카오 부문도 발효되고 애국주의 교육도 진작 실시된 지 오래라서 [[포르투갈어]]를 쓰는 국제학교도 중국 [[오성홍기]]를 게양하고 조회 때 의용군행진곡을 제창한다. 마카오는 진작 민주파가 나가리되어 정치적으로 조용한 편이다.] 하지만 이 때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를 '중국 땅이지만 포르투갈 정부가 행정권을 행사하는 곳'으로 해석하는 데 합의하여[*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당시부터 [[포르투갈령 마카오]]와 [[영국령 홍콩]]에 대해 "중국 땅(주권)이지만 영국/포르투갈이 행정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주권과 치권은 불가분이므로 반드시 반환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포르투갈은 [[1974년]]에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인정한 것이다.] 언젠가 반환이 이뤄져야 하는 데는 양국이 입장의 일치를 보였고, 포르투갈 정부도 이에 근거해 [[1976년]]부터 마카오 정부에 광범위한 자치권을 이양했다. 그리고 영국이 전향적으로 '''[[홍콩]] 전체를 반환하고 중국이 특별 행정구역으로 관리'''하기로 결정한 [[1984년]] [[중영공동선언]] 이후 포르투갈 정부는 [[1987년]]에 또 다시 반환 의사를 표명하였는데 이번에는 중국이 받아들임으로써 [[1987년]] [[3월 26일]]에 홍콩과 유사한 [[일국양제]]의 논리로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함을 규정한 [[중국-포르투갈 공동선언]]을 체결한다. 이에 따라 마카오는 [[1999년]] [[12월 20일]]에 [[마카오 반환|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홍콩과 마찬가지의 일국양제 원칙이라서 경제적 자유가 전면 보장되고 사회주의 체제는 적용되지 않는다. 즉 홍콩처럼 마카오도 사실상 '''중국본토와 같은 사회주의 체제가 영구 적용되지 않는다'''. 이를 어기면 [[포르투갈]] 정부가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됐다. 물론 현대까지도 그럭저럭 [[강대국]]인 [[영국]]과 달리 유럽에서도 소국인 포르투갈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중국에 직접 압력을 가할 수단이 거의 없는 만큼, 그 방법은 마카오 거주자 및 자본의 일괄 철수와 같은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이며, 실질적으로 마카오는 홍콩과 달리 중국이 포르투갈령 시절부터 이미 이것저것 많이 영향력을 뻗쳐놓아서 포르투갈이 굳이 압력을 가할 구실도 없다. 그리고 [[홍콩]] 및 [[광둥성]] 정부와 공동으로 마카오 옆 [[주하이시]]의 일부인 헝친다오를 개발하고 있다. 마카오 대학의 캠퍼스를 [[주하이시]]가 임대 형식으로 떼어줬는데 실질적으로 영구 임대로 보면 되며 점진적으로 마카오의 확장에 헝친다오를 적극 이용할 계획이다. 그리고 [[2018년]] [[강주아오 대교]]가 개통돼 홍콩에서도 이 헝친다오를 차량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 내 경제특구인 [[선전시]]나 [[주하이시]], [[산터우시]], [[하이난성]] 같은 곳들보다 별도 국가처럼 취급되는 자본주의 특별행정구들인 홍콩과 마카오가 더 돈이 되는 것을 알고 있으며[* 이들 지역들도 결국엔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며 따라서 중국본토 내에 적용되는 모든 규제에 발이 묶여버렸다. 이는 국제 비즈니스에 치명적이다.], 따라서 이는 중국이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땅 일부를 떼어 내 사회주의 체제가 적용되지 않는 곳으로 만든 최초의 사례라 볼 수 있다. 물론 자치나 민주주의와는 별 상관 없는 별도 관세구역 및 자본주의 경제체제 전면 적용지역[* 이리 되면 중국 본토 내의 사회주의 규제들이 완전히 적용되지도 않고 페이스북, 유튜브, 트위터 등 다국적 기업들의 마케팅에 꼭 필요하지만 중국본토 내에서는 막혀있는 SNS의 사용도 가능하며 이래저래 장점이 많다. 경제자유지수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하다.]인데 하는 김에 사실상의 자치를 허용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상 자치가 중앙에서 직접 특별행정구를 운영하는 것보다는 더 효율적이다. [[포르투갈]] 정부는 옛 식민지에 이미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주민 및 그 후손 전원에게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하였다. 특히 포르투갈 국적법이 개정된 [[1981년]] 11월 19일 이전에 [[포르투갈령 마카오]]에서 태어났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혈통과 상관없이 포르투갈 국적을 인정하고 있다. [[유럽연합]] 소속국인 포르투갈 국적이 있으면 사실상 유럽 어디서든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만큼 이는 상당한 특혜를 부여한 것이다. [[포르투갈]]이 마카오인 모두에게 국적을 부여한 이유에 관한 설 중 하나는 마카오보다 앞서 [[1970년대]] [[카네이션 혁명]] 이후 [[아프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할 당시, 3대 이내 포르투갈 본토 태생의 선조가 있는 이를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인들에게는 포르투갈 국적을 부여하지 않았는데, 문제는 식민지 전쟁 당시 포르투갈군의 과반 이상을 차지했던 식민지 태생 주민들이 독립 후 내전이 발발하면서 반역자로 몰려 대거 숙청당하는 학살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에 포르투갈 정부는 마카오 주민들에게 국적을 주는 방향으로 선회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 이후 오랜 세월동안 역사적으로 심각한 인구 부족에 시달렸는데[* 남자들이 툭하면 배 타고 멀리 [[아프리카]]고 [[남아메리카]]고 호르무즈고 [[인도]]고 다 나가버려 다 죽어버린 까닭에 짝 없는 여자들도 많았다.] 경제력이나 시민의식이 매우 낙후된 아프리카 식민지들과 달리 본국 못지않게 시민 의식이 높고 경제력이 있는데다 포르투갈 본국과 문화적 연대가 있는 마카오인들은 잠재적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이민자가 될 수 있었던 측면이 있다. 지금도 유럽 연합 역내에서 부유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투자이민을 가장 많이 받아주는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어쨌든 이에 따라 반환 이전 마카오에 합법적으로 거주하던 43만 명[* 대부분 19세기 이전부터 살아온 [[중국인]]들인 마카오인(마카이엔사, 마카니즈)들이다. 20세기가 되어 대륙에서 유입된 [[광동인]]들은 포르투갈 국적을 못 받았다. 이들은 [[포르투갈어]]도 못 한다. 이 사람들은 반환 이후 중국(마카오) 국적을 받았다.]은 반환 이후에도 포르투갈 국적을 유지할 수 있게 했는데 이는 [[영국]]이 [[홍콩]] 주민들에게 BNO라는 제한적 국적만을 부여한 것과 비교되는 처사로 평가되고 있다.[* 영국은 홍콩인들을 [[북아일랜드]]로 이주시키는 방안도 검토했지만 기각되었다.[[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7/03/0200000000AKR20150703180900085.HTML|#]]] [youtube(cZ_E2BPghbc)] 마카오 반환식 영상이다.[* 반환식에 참석한 당시 포르투갈 총리는 이후 [[UN 사무총장]]이 되는 [[안토니우 구테흐스]]이다.] 2년 전 [[홍콩]]에서도 [[홍콩 반환|유사한 의식]]을 거행했다. 15세기 [[포르투갈인]]들은 [[브라질]]에서부터 [[일본]]까지 세계 각지를 항해하며 세계 제국을 이루었지만, 1999년 12월 20일 '''최후의 식민지'''였던 마카오를 중국에 반환하면서 '''[[포르투갈 제국]]은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영상은 '''인류 최초의 근대적 [[식민제국]]이자 최후의 식민제국이었던 포르투갈 제국의 퇴장, 향후 [[G2]]가 되는 신흥 강대국 중국의 등장'''을 상징한다. 반환식 뒤의 조명 역시 푸른 바다에서 온 포르투갈 제국과 푸른 깃발의 포르투갈령 마카오 깃발을 떠올리게 하는 파란색에서 떠오르는 사회주의 신흥 강대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인 붉은 색으로 바뀌는 등등 2년 전 반환식과는 다르게 시각적으로도 신경을 썼음을 보여준다. 중국 반환 이후, 중국 중앙정부가 인근 도시 [[주하이시]]에 [[인민해방군]]을 주둔시키고, [[포르투갈령 마카오]] 시대에 막장 치안으로 악명높았던 마카오에서 범죄 타파에 나섰고, 현재 치안은 매우 안정되어 있다. 물론 [[카지노]]로 슬슬 이름을 날리면서 고객 끌어모으려고 마카오 주민들 스스로 치안을 정리한 점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새로 조직된 [[마카오 치안경찰국|마카오 경찰]] 덕분이다. 기존 포르투갈 경찰로부터 인원 및 장비를 이어받아 새로 조직된 마카오 치안경찰이 치안향상을 위해 많이 노력했고, 그 결과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 이미지 반전에 성공했다. 또한 배후의 경제특별구인 [[광둥성]] 주하이와 연계해 카지노 산업과 관광업 중심에서 조금씩 벗어나 여러 제조업, 금융업도 육성되고 있다. [[시진핑]]이 반부패 척결을 내세우면서 마카오 카지노들의 숨통을 억죄는 판국에 카지노만 고집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유력산업은 여전히 카지노인데 대상이 영미권 관광객이나 [[동남아시아]] 화교 등으로 바뀌었다. 나무위키에서 자주 시진핑을 언급하지만 시진핑은 카지노 자체를 금지하는게 아닌 고위공직자들의 기강을 잡는데 주력하며 일반인 인민들이 자기 돈으로 도박해서 가산을 탕진하는 건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중국 공산당 고위층이 암암리에 마카오에서 도박을 즐기다 거액을 날려 문제가 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눈부신 경제발전과 산업 다각화로 [[2006년]] 홍콩을 처음 1인당 GDP에서 추월하였으며[* 물론 삶의 질은 아직까지 홍콩이 앞선다.], 현재는 관광객 수조차 동등한 수준까지 올리는데 성공하였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277&aid=0003283393|그리고 [[2014년]]에는 [[스위스]]를 따돌리고 1인당 소득 세계 4위를 차지했다.]] 현재 마카오의 1인당 GDP가 한화 1억원 정도니 말 다 했다. 삶의 질이나 기타 소프트웨어는 홍콩이 비교할 수 없게 앞서지만 마카오가 실질적 소득은 더 앞서며 빈부격차도 이쪽이 더 적은 편이다. 당장 집부터 마카오 쪽이 더 넓고 쾌적하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마카오, version=1311)] [[분류:마카오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