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크리누스 (문단 편집) === 반란, 그리고 죽음 === 그런 분위기 속에서, '''가짜 안토니누스'''가 나타났다. 그는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Juila Maesa)의 외손자인,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진 14살의 바리우스 아비투스였다. 마크리누스의 철저한 대비에도 율리아 마이사는 20년 세월 동안 쌓아둔 로마 제국 전역의 인맥을 동원해 연락을 취했고, 친정이 있는 에메사 왕가의 남은 재산을 올인해 재기의 도박을 벌였다. 때마침 언니 돔나가 자살 전, 카라칼라 측근 및 충성스러운 병사들과 공모하면서 판이 어느 정도 마련됐다는 점, 이 문제로 마크리누스가 로마로 가지 못하고 강제로 안티오키아에 머물게 된 점도 율리아 마이사 입장에선 기회였다. 더욱이 로마에 동결된 세베루스 왕조의 모든 재산을 되찾을 생각이라면, 마이사와 두 딸에게 토착 왕가로 에메사 일대에서 오래 부를 쌓아 둔 시리아 일대의 재산은 아깝지 않았다. 마이사의 큰딸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오랜 기간 연인인 간니스의 잔꾀에 따라, 그럴듯한 스토리가 완성되자 마이사 모녀는 동방에 있던 원로원 의원, 총독, 군사령관들과 접촉해 방문일을 정했다. 218년 5월 15일 밤, 소규모의 추종자 무리가 율리아 마이사와 섹스투스 바리우스 아비투스를 에메사 근처의 라파나이아(Raphanaea)에 있는 제3군단 '갈라카' 병영으로 몰래 데리고 갔다. 다음 날 아침 군인들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고 공개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아비투스가 정말로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소문에 특히 열광적이었는데, 왜냐하면 카라칼라는 이전의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군대 내에서 인기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마크리누스는 아홉살 난 아들 [[디아두메니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 직위에 올림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 했다. 그는 이를 기회로 병사들에게 하사금을 나눠주며 그들의 신임을 다시 얻어보려 했지만, 대세는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결국 그는 안티오키아로 달아나야 했다. 218년 6월 8일, 마크리누스는 안티오키아 외곽에서 반란군들에게 패한 후 로마에서 지원군을 규합하겠다는 희망을 갖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는 발각되지 않으려고 수염과 머리를 다 밀었지만, 결국 정체가 탄로났고 보스포루스를 건너려고 기다리던 중에 칼케돈(Chalcedon)[* 터키 이스탄불 맞은 편 보스포루스 해협 동부 해안에 있던 고대의 해상도시.]에서 체포되었다. 거의 같은 시각에 그의 아들 역시 시리아 국경에 있는 제우그마에서 파르티아로 달아나려다가 체포되었다. 마크리누스는 감시를 받으며 남으로 이송되다가, 카파도키아(Cappadocia)[* 아나톨리아 중동부를 일컫는 고대 지명.]에 있는 아르켈라이스(Archelais)에서 백인대장에게 처형되었다. 그의 나이 53세 때였다. 결국 그는 황제로서 로마는 고사하고 [[유럽]] 대륙에 발조차 못들인채 죽음을 맞이하였으며 그렇게 세베루스 왕조는 지속되게 된다. 그가 몰락하게 된 이유는 파르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도, 엘라가발루스 지지 세력들과의 싸움에서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의 입지가 손상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군대의 급료와 특권들을 함부로 다루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깨닫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