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리장성 (문단 편집) === 명-청 시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travlang.com/great-wall-of-china_aa.jpg|width=100%]]}}} || [[명나라]]대에 이르러 제11대 세종 [[가정제]] 때 몽골족의 [[알탄 칸]]에게 베이징이 포위되는 사건(경술의 변)이 일어난 후 몽골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12대 목종 '''[[융경제]] 때'''가 되어서야 현재와 같은 벽돌을 이용한 장성의 형태로 굳어졌다. 하지만 명나라의 영역이 기존 한나라의 영역보다 상당히 남쪽으로 축소되었으므로, 사실상 장성을 신축해야 하는 데다가 공법의 변화까지 겹쳐서 장성의 재건설은 장기간에 걸쳐서 천천히 지속되었다. 그리고 장성의 수축은 베이징 중앙정부의 지시에 따라 체계적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지역 지휘관의 재량에 따른 판단으로 임의적으로 수축된 것이었고, 그래서 성벽의 재료도 지역마다 달랐다. 벽돌로 지은 곳도 있고, 바위로 쌓은 곳, 흙벽돌로 쌓은 곳 등등. 일부 구간은 결국 [[명나라]]가 [[이자성]]의 농민 반란으로 멸망당하는 시점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 구간은 완성되어서 상당한 방어력을 부여받았으며, 대표적인 곳이 장성 동쪽 끝의 [[산해관]]이었다. 실제로 명대 만리장성은 만주족인 청군이 돌파한 것이 아니라, 명나라가 이자성의 반란군에게 멸망한 사실을 안 명장 [[오삼계]]가 반란군을 토벌할 때 지원군으로 [[도르곤]]의 청군을 사용하기 위해 협약을 맺고, 그냥 문을 열어줘서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시대쯤 되면 공성기술이 상당히 발달되었으므로 설령 만리장성이 석조성이 되었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양상은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산해관 같은 강력한 점방어가 가능한 몇몇 지역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성벽 한 겹인지라 대군으로 밀고오면 뚫렸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북방의 [[몽골]]까지 지배하는 상태였으므로 당연히 만리장성의 효용가치가 없어서 베이징 근처의 일부 구간만 약간 보수하는 선에 그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