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문단 편집) === [[인도유럽어족|인도유럽인]] ===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그리고 일부 [[벨라루스인]]. 이들은 [[러시아 극동]] 지역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극히 일부이긴 하지만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폴란드인]] 및 [[발트족]] 또는 [[독일계 러시아인]]들 또한 이주해왔다. 1600년대 러시아의 팽창기에 [[우크라이나]] [[코사크]]들을 중심으로 시베리아를 개척하며 진출해왔으나, [[나선정벌|청과의 국경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후 이들은 만주에서 밀려나 스타노보이 산맥 이북 시베리아에 설립한 소규모 정착지를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따라서 이들이 본격적으로 만주에 이주해오기 시작한 것은 1860년대 [[베이징 조약]]으로 러시아가 청나라에게서 외만주를 뜯어낸 이후부터이다. 러시아는 부동항을 건설하고 극동에서의 패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수의 도시를 건설했다. 특히 [[니콜라이 2세]] 치세에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의 이주 장려 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수의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인들이 극동으로 이주해왔다. 주 거주지는 프리모리예 지방과 하바롭스크 지방 등 러시아령 극동이지만, 한때는 만주 전역을 러시아 제국이 세력권으로 삼으면서 남만주 랴오둥 성에 [[러시아령 다롄]]이란 이름의 군사적 식민지를 세운 적도 있다. 또한 [[하얼빈]] 등 중국 내만주 지역의 개발에도 일익을 담당했으며, 러시아 내전에서 패배한 백군 세력이 중화민국령 내만주로 탈출해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세운 적도 있다. 다만 현재 중국령 동북 3성 및 3시 1맹에서 이들 잔존 백군 세력의 자취를 알아보기는 힘든데, 세계대전을 거치며 일본에게 탄압당하고 [[만주 작전]]으로 쳐들어온 [[소련군]]에 의해 대다수가 납치당하거나 해외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외만주의 러시아인의 비율은 90%을 넘어간다. 시베리아의 [[사하 공화국]]이나 [[추코트카]] 지역이 원주민 비율이 절반 이상인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외만주 지역은 특히 러시아인이 많이 유입된 곳임을 알 수 있다. * '''[[러시아인]]''' 러시아령 극동 지역의 지배적 민족. 외만주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인 및 우크라이나/벨라루스계 러시아인들이다. 내만주 지역 종족들이 한족을 중심으로 중국인 정체성에 동화되어 있다면, 외만주의 종족들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아무르 강 일대에는 17세기부터 진출했으며, 그 이남으로는 19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러시아의 동방 창구인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와 [[하바로프스크]]가 가장 핵심적인 지역들이다. 내만주 지역에도 과거 러시아 제국의 남진 정책으로 인해 [[하얼빈]]과 [[다롄]]에 특히 많이 모여살았다. 두 도시는 사실상 러시아가 지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특히 하얼빈은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이 패배한 후 해외로 도피한 백계 러시아인 수십만 명이 모여 사는 핵심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만주국 수립 후 일본 [[관동군]] [[731 부대]]의 범죄적 생체실험의 주된 희생양이 됐고, 1945년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소련군이 관동군을 박살내며 쳐들어오자 대부분 소련으로 압송됐다. 그래서 현재 내만주의 러시아인 집단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동슬라브어파의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 러시아의 시베리아 개척 당시 동원됐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을 기원으로 한다. 공식적으로는 하술할 폴란드계 소국인 야크사의 시민들 중 우크라이나어 사용자들이 다수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야크사와 알바진 요새가 청나라에 병합되자 해당 요새의 우크라이나인 카자크들은 베이징에 모여 살았고, 그 후손들은 현재까지 알바진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는 19세기 중반 외만주를 청나라에게서 할양받은 후 카자크 부대들이 국경 수비를 위해 정착하기 시작했고,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의 극동 이주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인 가구가 다수 이주했다. 19세기 말이 되면 연해주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이 우크라이나인이었다. 때문에 러시아령 외만주 지역은 [[우크라이나어]]로 녹색 쐐기를 의미하는 젤레니 끌린(Зелений клин)으로도 불린다. 이는 러시아 내 우크라이나계 분포 지역 중에서도 남부 연방관구나 카자흐스탄 접경지대를 제외하면 독보적으로 우크라이나인이 많은 곳이다. 때문에 이들은 한때 [[젤레나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다수가 러시아인에 동화되어 있다. 언어는 과거에는 [[우크라이나어]]를 입말로 써왔으나 현대에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역시 [[러시아 정교]]이다. * '''[[벨라루스인|벨라루스계 러시아인]]''' [[표트르 스톨리핀]]의 시베리아 이주 지원 정책 이후 다수가 이주했다. 주로 [[아무르 주]]를 중심으로 분포한다. 언어는 과거에는 [[벨라루스어]]를 입말로 쓰기도 했으나 현대에는 [[벨라루스|본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하며, 민족 종교는 [[러시아 정교]]이다. * '''[[폴란드인]]/[[폴란드계 러시아인]]''' 17세기 중반 볼히니아의 폴란드인 귀족이었던 니키포르 체르니고프스키가 총독을 살해하고 도주하여 아무르 강변에 세운 [[작사(국가)|야크사]]라는 자그마한 국가를 기원으로 한다. 그가 이끄는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은 청나라의 맹공격을 받은 후 반쯤 버려진 정착지였던 알바진 요새를 점거하곤 주변의 퉁구스계 [[야인여진]] 부족들을 규합하여 독립 국가를 선포했다. 외교 언어는 [[폴란드어]]였다. 그러나 20년 후 청나라령으로 병합됐다. 이후 폴란드인들은 19세기에 다시 한 번 대대적으로 이주한다. 당시 폴란드는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 세 제국에 분할되어 있었기에 탄압이나 강제 이주, 또는 취업을 이유로 세 국가의 각지에 정착했다. 러시아의 영향권인 만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얼빈]]과 중동로 철도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데에는 폴란드인 기술자와 노동자들의 역할이 컸다. 또 독립운동과 반러 운동을 일으킨 폴란드인들도 다수 하얼빈에 모여들어 사회를 구성했다. 한 때 1만여 명에 달했던 하얼빈의 폴란드인 공동체는 불행히도 [[관동군]]의 [[731부대]]와 [[소련군]]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등등 사건을 거치며 입지가 크게 흔들리게 됐다. 1937년에 소련과 만주국은 오직 양국 국적을 가진 국민만이 하얼빈 철도에서 일할 수 있다는 협정에 서명하는데 이 협정으로 인해 많은 폴란드인들이 철도청에서 쫓겨났고, 3년 후(1940년부로) 하얼빈 내 폴란드어 신문은 재정난으로 발행이 중단됐다. 1947년 중화인민공화국은 하얼빈에 남아있던 폴란드인들을 모조리 추방하기로 결정하는데, 당시 하얼빈에서 추방당한 폴란드인들은 슈체친에서 하얼빈 향우회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https://culture.pl/en/article/harbin-a-polish-city-in-china|#]] 하얼빈에서 가장 큰 가톨릭 성당인 예수 성심 대성당은 하얼빈에 정착한 폴란드인들이 세운 성당이다. 중국 3대 맥주이자 한국에서도 유명한 [[하얼빈(맥주)|하얼빈]]의 경우, 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 출신의 얀 브로블레츠키가 중동철도를 건설하던 러시아인 노동자들에게 팔기 위해 하얼빈에 맥주 양조장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 '''[[독일계 러시아인]]''' 러시아 내에 살던 독일인들, 그 중에서도 [[볼가 강]] 중류에 살던 [[볼가 독일인]]들이 주를 차지한다. 러시아 제국의 극동 개발과 함께 일부가 이주했다. [[하얼빈]]에도 독일계 러시아인들을 위한 [[루터교회]]가 존재했을 정도다. 하얼빈 난강 기독교 교회는 원래 독일에서 온 루터교 이민자들을 위한 예배 장소였다고 한다.[[https://www.sixthtone.com/news/1000760/orthodox-churches%2C-unorthodox-histories-in-chinas-far-northeast|#]] 러시아계 독일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가 벌어지면서부터였다. 농업을 업으로 삼던 [[볼가 독일인]]들은 농업 집단화에 반발하며 외만주의 중-러 국경으로 이주해 탈출하곤 했다. 다수는 [[재세례파]]의 일종인 메노나이트 신도들이었는데 또 일부는 루터교 신자들이기도 했다고. 이들은 무일푼이었기에 하얼빈 일대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기도 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1930년대부터 세계 루터교회에서 이들을 탈출시켜 남미의 [[파라과이]]나 [[미국]]에 재정착시키는 것을 도왔다. 그 외 주로 귀족 계층이었던 [[발트 독일인]]들 중 백군에 가담했던 이들 일부가 하얼빈에 모여 반소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언어는 게르만어파의 [[독일어]]를 사용했으며, 종교는 [[루터파]] [[개신교]]를 주로 믿었지만 볼가 독일인 출신자들은 [[재세례파]]가 다수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