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 (문단 편집) === 지명의 역사적 고증 === || [[파일:盛京舆地全图1734.jpeg.jpg|width=340]] || || 《성경통지(盛京通志)》 〈성경여지전도(盛京輿地全圖)〉, 이 지도에서는 성경의 범위를 북쪽으로는 [[스타노보이 산맥|외흥안령]], 남쪽으로는 [[동해]](남해), 동쪽으로는 [[오호츠크 해]]와 [[동해]](동해), 서쪽으로는 [[산해관]]에 이른다고 서술했다. || 청 이전 만주를 주로 부르던 명칭은 넓은 의미로서의 "[[요동]]"이었다. 청이 들어선 이후, 청 정부는 만주를 ''묵던''(盛京, 성경, Mukden)·''닝구타''(Ningguta)·''기린''(Girin)·''사하랸 우라''(黑龍江, 흑룡강, Sahaliyan ula) 등 각기의 지명을 사용했다. [[옹정제|옹정]] ~ [[건륭제|건륭]]기에 이르러 성경, 닝구타, 사하랸 우라 즉, 삼장군이 관할하는 세 지방을 직성에 준하여 비공식적으로 동삼성(東三省, dergi ilan golo)라 통칭했다. 이외에도 성경이나 동북방(東北方, dergi amargi ergi), 관외(關外, furdan-i tule)라는 지명들이 사용됐다.[* 이훈(2013), "17-18세기 淸朝의 滿洲地域에 대한 政策과 認識 : 건륭기 만주족의 위기와 관련하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만주라는 지명은 1747년부터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의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아시아 지도와 같은 일부 초기 지도에 지역 종족적 지명으로 나타났다.[*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 사실 조선에서는 압록강-두만강 이북의 닝구타 등지를 청의 발상지 내지는 고국으로 인식하면서 '만주(滿洲)'라 부르기도 했으나, 오늘날 만주 지명과 연속성이 없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그 이전 17세기 ~ 18세기 [[유럽]]에서는 이 지역 일대를 [[여진족|여진]](Niucehé)이나 [[숭덕제]]의 [[몽골어]] 존호인 복다(boɣda)를 딴 보그도이(Bogdoi)로 부르거나, 중국 타타르(Chinese Tatary), 동타타르(Tartarie Orientale)의 일부로 취급했다. || [[파일:MAP OF ASIA-18TH.jpg|width=200]] || [[파일:chiqyuzenzu_20201114_161147.jpg|width=180]] || || 영국의 [[조지 2세]]와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왕립 제도사가 된 고유한 명성을 얻은 웨일스 지도 제작자 에마누엘 보웬(Emanuel Bowen, 1693 ~ 1767)이 1747년 [[런던]]에서 간행한 《A New & Accurate Map of Asia》의 확대 부분. || 1782년 해상 조난 후 러시아로 갔다가 1792년 귀국한 이세국(伊勢国)의 뱃사공들의 체험을 난학자 가쓰라가와 호슈(桂川甫周)가 청취 후 작성하여 1794년에 간행한 《북사분략(北槎聞略)》의 〈지구전도(地球全図)〉의 확대 부분. || || [[파일:Nipponv1.jpg|width=400]] || || 네덜란드 상관의(商館醫)으로서 1823~29년 까지 일본에 체류했던 독일인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 ~ 1866)가 귀국하여 1832~52년 간행한 《NIPPON》 1권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 그와 교류하며 일본변계략도 등을 제공했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는 지볼트의 귀국 과정에서 지도의 존재가 들통나면서 옥사했다.[* [[https://m.blog.naver.com/correctasia/220800461174|지볼트의 행적에 관한 글]]] || 아마도 청 예수회 지도 프랑스 사본에 기초한 러시아 지도 또는 1751년부터의 네덜란드 지도 등에게 영감을 얻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쓰라가와 호슈의 1794년 《아시아전도(亜細亜全図)》및 《지구전도(地球全図)》나, 다카하시 가게야스(高橋景保)의 1809년 [[https://pbs.twimg.com/media/DCU5s7RV0AAC_VE.jpg| 《일본변계략도(日本邊界略圖)》]] 등 난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도 만슈(满洲)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Mark C. Elliott(2000), "The Limits of Tartary: Manchuria in Imperial and National Geographies", 《The Journal of Asian Studies》Vol. 59, No. 3; John Karl Treiber(2004), 《Mapping Manchuria: The Japanese Production of Knowledge in Manchuria-Manchukuo to 1945》, p. 34~35.], 이는 필립 폰 지볼트(Philipp von Siebold)에 의해 '만주리아'로 번역되어 [[네덜란드]]로 다시 전해지면서 유럽인들에게 확산됐다.[* John Steinberg(2007), 《The Russo-Japanese War in Global Perspective: World War Zero, Volume II》, p. 514.] [[프랑스]]에 기반을 둔 지리학자 콘라드 말트 브룬(Conrad Malte-Brun)와 애댐 멘텔(Edme Mentelle)은 1804년 [[https://books.google.co.kr/books?id=CghUAAAAQAAJ&pg=PA144&redir_esc=y#v=onepage&q&f=false|《Ge'ographie mathe'matique, physique etpoIitique de toutes les parties du monde》]]에서 타타르보다 더 정밀한 용어로 몽골리아, 칼미키아 등과 함께 만주리아라는 용어를 장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