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만주/역사 (문단 편집) == 접근 == 오늘날 [[만주]]라는 표현은 [[일본]] 등 [[열강]] [[식민제국]]들이 [[유조호 사건|만주를 침공]]하면서 이 지역의 [[중국]]로부터의 분리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상한 것이지만, 현재 만주(또는 동북)로 여겨지는 영역은 이미 전근대에도 중국([[화북]], [[강남(중국)|강남]])과는 이질적인 지역이었다. 전통적으로 만주는 [[만리장성]] 바깥에 위치한 새외(塞外)로 여겨졌으며, [[중원]]의 한족들은 이 일대를 근거로 삼은 왕조를 자신들과는 다른 이민족 [[정복왕조]]로 여겼다. 근대 [[중화민국]] 수립 당시에도 그러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한족들 사이에서도 한족 18성을 제외한 동북3성(만주)이나 내·외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은 독립시켜야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오히려 전근대에는 만주와 한반도가 연계될 때도 많았다. [[남북국시대]]까지는 한반도 북부와 남만주 일대가 '[[요동]]'이라는 하나의 인문지리적 영역으로 묶여 있었으며, [[고려]]의 [[서희]]가 여진족을 몰아내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북도와 함경도는 여진족의 땅이었고, 역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인접지역의 여진족이 [[조선]]에 복종하면서 번호(蕃戶)라고 불리기도 했다. 지금처럼 만주와 한반도가 완전히 나뉘게 된 건 청대부터이다. [[일본]]은 자신들의 [[만주사변|만주 침공]]을 정당화하고 '식민지 조선'의 확장으로 내세우기 위해 '[[만선사관]](만주 + 조선)'--환빠의 시초--을 고착시켰다. 일제가 무너지면서 이런 흐름도 단절되긴 했지만, 이때의 역사 연구 때문에 [[말갈]], [[발해]] 쪽 연구는 [[식민사관]]을 떠나 객관적으로도 일본의 연구가 앞서있다. 한편 이 시기 향토사학의 입장에서 만주를 연구했던 진위푸(김육불)의 경우도 현재까지 인용되는 역사가의 한 명이다. 다만, 그는 현재의 [[동북공정]]과 유사한 사관을 취했다. [[중국]]에서는 동북공정을 중심으로 만주사를 재구성하고 있는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동북공정 이후 [[동북아역사재단]]을 중심으로 만주사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한중 둘 다 자국을 중심으로 만주를 변경 취급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한규 교수는 그의 저서 『천하국가』 및 『요동사』에서 만주 역사의 주도 세력을 크게 예맥계, 동호계, 숙신계로 정의했다.[* 이외에 김한규 교수는 현재까지 '만주'로 불려오던 지역 구분을 '[[요동]]'이라는 명칭으로 대체하고 '[[민족]]'이라는 단어를 '[[역사]] [[공동체]]'로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있으나 잘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 또한 김한규 교수는 예맥계와 한(韓)계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소수의 인물 중의 한 명이다.(다만, 이러한 견해들은 과거 일제가 [[만선사관]]을 주장하며 고구려, 발해 등을 다수의 [[조선인]]들이 속하는 한반도 세력과 구분되는 만주 세력으로 분류하고, 이들이 한반도 세력을 영향력 하에 두었다는 식민사관을 펼친 전력이 있는 터라 접근하기가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더불어 동북공정에 반대하는 의미에서 중국과 '요동(만주)'도 구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정의는 한국 사학계와 중국 사학계 모두에게 거부당하고 있는 형편.] 이 구분에 따르면, '예맥'계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에까지 이어졌으며 [[한반도]] 북부 및 [[압록강]] ~ [[두만강]] 인근의 만주 중부 지역을 중심으로 했으나 이후 타 세력에 흡수되었다. '동호'계는 산융, 동호 - 오환, [[선비족|선비]] - [[거란]], 해, [[습족|습]], [[실위]] - [[몽골]]로 이어졌으며[* 그러나 선비나 몽골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계통 논란이 활발하다.] 주로 [[랴오허|요하(랴오허) 강]] 인근을 중심으로 한 만주 서부에 거주했으나 [[칭기즈 칸]] 시대 이후 와해되어 몽골에 흡수되었다. '숙신'계는 숙신 - 말갈/물길 - 여진 - 만주로 이어졌으며, 본래 만주 동북부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나 두 세력이 소멸한 이후에는 전 만주 일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들은 본래 [[수렵]] 및 [[약탈]]을 주로 하고 농업과 [[가죽]] 교역 등으로 생활을 보조하는 삶을 살았으나, 점차 타국의 영향을 받아 농경 사회의 역량을 흡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주의 토착 3종작 외에 한족계도 만주 에 진출하여 요동-요서를 중심으로 간간히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한족에 거의 동화된 근현대 청나라 [[베이징]] 지배층의 만주 개방 및 [[동북삼성]] 설립, [[틈관동|한족]]과 [[간도|조선인들의]] [[연변|만주 유입]], 그리고 [[일본 제국|일제]]의 [[만주국]], [[중국 공산당]]의 민족평등대우 등으로 말미암아, 이곳에 살던 토착민들은 자기 삶을 보전하고 있다고는 하나 [[소수민족]]으로 전락하여 그 주도권을 한족에 많이 빼앗겼으며, [[만주어]]로 대표되는 고유 문화도 자발적 동화로 거의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정리해보자면, 전근대 만주를 주름잡은 4대 종족인 [[동호]]/[[예맥]]/[[숙신]]/[[한족]]은 각자 현재 몽골(동호)[* 일부 선비, 거란은 한족에 동화되기도 했다.]/한국(예맥)/중국(숙신, 한족)으로 계승되었다. 따라서 몽골은 선비, 거란 등의 동호계 제 종족의 역사를 자국사로 여기며 한국이 고구려, 발해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는 것처럼 요나라 역사를 두고 중국과 다투고 있기도 한 실정이다. 다만 몽골은 동시에 선비와 거란보다는 오히려 칭기즈칸 이후의 [[몽골사]]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면 만주족은 청 시기에 몽골과 중국을 지배하고 한국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청 붕괴 후 [[민족국가]]를 세우지 못해 중국으로 흡수되어 [[중국/민족|중국의 소수민족]]이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현실. 이렇게 만주에서 여러 종족이 교류하며 역사를 써갔다 보니 이들은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런 배경하에서 몽골족과 한민족이 동족이니 만주족와 한민족이 동족이라 하는 [[역사왜곡]]과 오해를 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